연애소설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사춘기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여학생은 물론 옆집 식모까지 점점 예뻐 보이니 내 마음에 병이 든것이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궁둥이가 쑤시면 가끔 우리 동네에 있는 상문당이라는 서점에 가서 주인 눈치를 보면서 연애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내 속을 뻔히 들여다본 주인 아저씨가 어느 날 도둑 독서를 하고 있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전 군, 연애소설만 읽을 것이 아니라 연애를 한번 해 보는 것이 어떤가?”

나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1940년, 그 당시 연애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윤리 도덕과 사회 풍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나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느냐고 묻고 내가 고개를 젓자 조용히 연애 비법을 얘기해 주셨다.

산에 가야 범을 잡는다고 하면서 그는 연애의 첫 걸음은 용기를 내는 데 있다고 했다. 여자가 따라오기를 바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내가 여자 꽁무니를 쫓아 다녀야 한다고 했다. 내가 쫓아다닐 여자를 어떻게 찾느냐고 묻자 아저씨가 껄껄 웃으시면서 길에 걸어다니는 사람의 반이 여자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자 그는 예의 연애술이라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여고생이 수업이 끝난 뒤 학교에서 나올 무렵, 무심천(청주) 다리 옆에서 망을 보고 있다가 여학생이 하나 지나가면 그 여자 뒤를 쫓아가란 말이야. 무턱대고 달려가서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면 그 여자가 기절초풍할 테니 머리를 좀 쓰란 말야. 내가 이 책을 자네에게 선사할 테니 자네가 헐레벌떡 뛰어가 여자의 등을 툭 치고, ‘아가씨, 책을 떨어뜨렸네요’ 하며 이 책을 주란 말이야. 엉거주춤 책을 받아들고 ‘이 책은 제 책이 아니에요’ 라고 할 거야. 그러면 개똥참외는 줍는 사람이 임자라며 시치미를 떼고 그 여자에게 책을 선사하란 말이야. 여자들의 연애 감각은 참으로 비상해. 그때 본능적으로 자네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네 시나리오를 받아들이느냐, 않느냐를 결정할거야. 여자가 그럼 책을 한번 읽어보겠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확률은 20퍼센트밖에 안 돼. 하지만 내 말은 자네가 지나가는 여자의 옆구리를 다섯 번
찌르면 그 중 하나는 오케이 할 가능성이 있단 말이지.”

나는 놀랍고 고마웠다. 서점 아저씨가 나에게 준 책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었다. 내가 빙그레 웃으면서 나도 그 책을 읽어봤다고 했더니 아저씨는 이어서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사실 자네가 우리 서점에서 일주일 동안 이 책을 읽은 것을 알고 있고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손때 때문에 이 책을 팔 수 없게 됐어. 내가 자네에게 이 책을 주는 이유는 아가씨가 이 책을 받게 되면 아가씨가 얼마 전에 노벨 문학상을 탔다는 것을 알고 이런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한번 사귀어볼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야.”

나는 아저씨의 예지에 감탄하고 그의 선심에 감격했다.

그러나 앞길은 암담했다. 얼굴에 여드름이 생기고 코밑에 수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사실로 보아 내가 연애를 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가리는 것 많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한국 아가씨가 나의 여드름, 콧수염 콤비 펀치에 케이오 당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미남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운동선수도 아니었다.
앙드레 지드의 책 한 권을 읽었다는 사실이 나의 천재를 증명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아저씨의 전술에 의혹을 품자 그는 다음과 같이 낚시꾼의 심리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낚시터를 찾는 낚시꾼은 저마다 큰 꿈을 안고 간다. 큰 물고기를 몇 마리 잡아서 친구들과 아내에게 자랑하는 장면도 그려본다. 그러나 해가 뜨고 점심 때가 다가와도 고기는 잡히지 않고 모기에게만 물리면 실망과 체념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새벽부터 나왔는데 늦게 나온 학생이 엉터리 낚싯대를 가지고 월척을 낚으면 기분이 나빠지고 이윽고 억울한 마음에 화까지 나게 된다. 두 자짜리 가물치나 잉어는 어느덧 꿈에서 사라지고 반 뼘짜리 붕어라도 한 마리 잡았으면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에 가는 도중 생선집에 들러 붕어나 두세마리 사서 아내와 어린애들 앞에서 체면을 유지해야  되겠다고 시나리오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낚싯줄이 흔들린다. 신이 나서 낚싯대를 채올렸더니 조그만 붕어가 딸려 온다. 순간 실망감에 휩싸이면서도 그 낚시꾼은 안도감을 느낀다. 이 고기를 버려야 할까 어쩔까 잠시 생각하다가 그 붕어를 간직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낚시꾼의 심리라고 설명하면서 상문당 아저씨는 내가 만병통치 잉어는 되지 못할망정 중간치 붕어는 될 수 있는 당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서점 아저씨의 예지에 다시 한 번 탄복했다.


그러나 나는 무심천 다리 옆에 망을 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년뒤 군인 하사관 시절에 나는 간호사 아가씨와 여대생 한  명과 데이트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결과는 뻔했다. 나는 자격 부족으로 낙방을 했다. 한국에 있던 시절 나의 스코어는 제로였다.

미국이란 나라에 오자 나는 승부에 표준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나라는 늘 자신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대로 자유의 땅이고 용감한 사람의 고향이라는 것을 느꼈다. 다시 말하면 자유인으로서 용기만 있다면 모든 게 가능하다는 것이 미국의 뜻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상문당 아저씨의 예지를 실천해보기로 결심했다.


미국 여자들은 입 열기를 꺼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긴 입을 열어야 밥도 먹고 숨도 쉬고 키스도 하고 말도 할 수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지만, 한국에서는 처녀가 입을 벌리면 집안이 망한다는 미신이 있었다. 캠퍼스를 지나가는 낯선 여자가 ‘하이’하고 인사를 하면 ‘하이, 하이’하고 명쾌하게 대꾸했다. 미국에서는 광고를 해야만 물건이 팔린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입을 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첫 데이트는 우연의 산물이었다. 점심을 잘못 먹은 탓인지 오후에 강의실로 가는 도중 갑자기 배에 통증을 느끼고 들고 있던 책을 길에 떨어뜨리고는, 손으로 배를 안고 주저앉았다. 지나가던 아가씨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어떻게 된 일이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엉뚱하게 나온 말이 “어젯밤에 읽은 책이 소화가 되지 않아서 위경련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하고 임기응변을 했다. 그녀는 깔깔깔 웃으면서 자기 이름은 낸시라고 소개한 뒤 흩어진 책을 주워 모은 다음 팔을 내 옆구리에 돌려 매고 나를 기숙사로 안내하려고 했다. 엄마 손이 약손이라면, 젊은 여자의 손은 전기 손이다.

낸시의 손가락에서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나는 순식간에 위궤양이 완치되는 것을 느꼈다. 며칠 뒤 나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녀에게 첫 데이트를 신청했고 그녀는 나의 위궤양 완치를 위하여 쾌히 프러포즈를 승낙했다.


꾀를 내면 데이트보다 쉬운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앙드레 지드 전략은 미국에선 통하지 않았지만 더 지성적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레이첼은 얼굴도 예쁘지만 공부도 잘하고 줏대가 센 여자여서 미국 남학생들도 그 여자와 데이트 한 번 했으면 하고 소원해도 잘 응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아가씨였다.

나는 그녀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머리를 긁다 보니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미국 대학에서 데이트를 하기 좋은 길일은 금요일이다. 그 다음이 토요일 밤이다. 관습에 의하면 남자가 여자에게 화요일이나 수요일쯤 전화를 걸어서 금요일 저녁 데이트를 예약하는 것이 상례다. 나의 안은 상례를 뒤집어 참신한 전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토요일 아침에 레이첼에게 전화를 걸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오늘 저녁 시내 극장에서 벤허를 상영한다는 것을 막 알았습니다. 영화에 대한 평이 매우 좋습니다. 정말 극장에 가고픈데 사실 난 돈이 없으니 레이첼 양이 돈 없는 동양 학생을 도와주지 않으시겠어요?”

그날 저녁 영화 구경을 하고 돌아오면서 레이첼은 나를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집에 데리고 가서 만찬을 대접해주었다.
이 술책의 원칙은 자선은 기쁨이요, 사람은 누구나 허영심이 있어서 잘 보이려고 애를 쓴다는 점에 있다.

소문은 성공의 아버지다. 충청도 촌양반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평이 퍼지자 데이트하기가 점점 수월해졌다.
금발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때는 나는 평생 금발 여자와 데이트할 일이 없었는데 당신에게 첫 영광을 주겠노라고 했다.
빨강머리 아가씨에게는 빨강머리가 노랑머리, 검정머리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고 싶다고 했다. 키 큰 여자에게는 나는 항상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과 사귀고 싶다고 아첨하고, 남미에서 온 여자들에게는 바나나와 코코넛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문의할 사항이 있다고 했다. 이런 엉터리 짓을 프랑스 어로 파나슈 panache 라고 한다. 데이트 사업이 착착 진행되었다.


미국 아가씨들은 덩치는 크지만 착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성경도 잘 읽어서 물으면 대답을 하고 구하면 주어야 한다는 도덕을 지켰다. 데이트의 재미는 여자의 손을 잡고 키스를 요란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열등의식의 병을 고쳤다. 상문당을 들락거릴 즈음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못생긴 것을 자각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하늘도 원망했다. 그러나 여자 품에 두어 번 안겨보자 나의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이 왕창 바뀌어 버렸다. 삶은 슬픔이란 부처님 말씀 대신 삶은 즐거움이라는 노래가 나오고, 예수님의 말씀이야 어쨌건 천당에 가는 길은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을 찾는데 있다고 느꼈다.


나는 한탕주의자가 아니었다. 한탕 해먹고 돈주머니를 짊어지고 줄행랑을 치자는 패는 아니었다. 장기투자를 위해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아가씨에게 새로운 생일을 책정하고 신분증을 발부했다. 이리하여 크리스 생일은 2월 2일, 킴버리 생일은 11월 11일로 정해주었다. 그녀들은 저마다 그들의 진짜 생일에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한테서 카드도 받고 선물도 받는다.
물론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 카드와 선물은 그녀들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탄생 권리에서 비롯되는 응당한 배당금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하루가 지나면 카드는 모두 엊그제 신문처럼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그러나 로이스가 4월 4일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나의 생일 축하카드를 받고 나는 당신이 없으면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정말로 고맙게 여긴다는 나의 간곡한 사연을 읽으면 그녀는 좋아라 어쩔 줄 모르고 팬티가 흘러내릴 정도로 펄펄 뛴다.이런 행동이 여자의 호의를 사는 외교술이다. 성경에 의하면 100마리 양 중에서 얌전한 99마리 양들보다도 도망갔다가 되돌아온 말괄량이 양을 주인은 더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아가씨의 생일을 잘못 기억한다는 것도 데이트 요령의 한 가지다.

우리 대학에 한국 학생들이 4~5명 있었고 동양계 학생들도 꽤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다. 똑같은 옷을 일주일 내내 입고 다니는 촌놈이 어떻게 그리도 데이트를 잘하느냐고 놀라기도 했다. 몇몇은 나를 찾아와서 데이트 상담을 청했다.


그들의 첫 질문은 데이트를 어떻게 시작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용기라고 대답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데이트를 신청하라고 충고했다. 한국 사람, 일본 사람, 중국 사람은 너무 체면을 앞세우는 고질병을 가지고 있다. 여자가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면 어쩌냐는 질문에 나는 밑져야 본전 아니냐고 대꾸했다. 무엇보다도 미국 애들은 인권존중병에 걸려서 첫 데이트 신청을 함부로 거절하지 않는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데이트를 나갔을 때 무슨 얘기를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고, 평범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한다는 게 내 대답이었다. 여자의 가정환경이나 어떻게 자라고 어렸을 때 어떤 꿈을 꾸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참새같이 재잘댄다고 나는 통계자료까지 제공했다.


나는 여자 칭찬법도 강의했다. 누구나 칭찬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공치사는 향수와 같아서 냄새만 맡으면 기분이 좋지만 향수를 병째 마시면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라고 믿습니다.” 하면 여자는 순간 피부에 소름이 돋고 구토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좀 못생긴 여자도 거울을 들여다 볼 때 마다 내 눈은 멋있다, 내 코는 의젓하다, 내 입술은 섹시하다는 둥 한두 가지 자랑할 만한 특징을 찾아 으스대본다. 코 잘난 여자에게는 코를 칭찬하고, 눈 잘난 여자에게는 눈을 칭찬하고, 엉덩이가 방석같이 크면
은진 미륵 같다고 칭찬해야 한다. 해부학적으로 칭찬할 것이 없다면 그녀는 지성적이라고 칭찬하고, 그녀가 만천하에 알려진 깡통이라면 그녀는 한없이 착한 여자여서 그녀를 존경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하면 된다.


언제 여자의 손을 잡고, 언제 여자의 허리를 안고, 언제 어디서 키스를 해야 되나? 나의 통계에 의하면 5월 3일 저녁 8시 37분 24초가 제일 알맞은 순간이지만, 정감록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눈치 봐서 알맞은 때가 적기, 적순간이다.

첫 데이트에서 여자를 만나면 악수를 하는 것이 통례다. 악수를 한 뒤 10초안에 악수를 끝내라는 미국법은 없으니까 모른 척하고 여자 손을 계속 잡으면 된다. 기분이 좋으면 둘이 신이 나서 손을 잡을 수 있고 기분이 나쁘면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서 손을 잡을 수 있다.

여자 허리를 껴안는 법은 좀 지능적이어야 한다. 차들이 왔다갔다하는 길을 건널 때 좀 멀리서 차가 오는 데도 여자가 길을 건너려 하면, 여자의 허리를 껴안아 이를 만류하는 것은 건전한 술책이다. 길을 걷다가 여자가 넘어지려 하면 여자의 허리를 껴안고, 그럴 경우가 없으면 내가 넘어지는 척하고 여자 허리에 의존하고, 용기가 있으면 두 손을 여자 엉덩이에 대어 몸의 평형을 유지할 수도 있다.


키스는 어려운 과제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제일 무난하고 성공적인 방법은 ‘한번 눈을 감아보시오. 눈을 감으면 멋있는 일이 생깁니다.’ 하고 장담을 한다. 순진한 아가씨가 눈을 감으면 도둑 키스를 한다. 89퍼센트의 아가씨들이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37퍼센트의 아가씨들은 눈을 다시 감는다. 또 키스할 좋은 순간은 혈압이 오를 때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가슴이 두근거리면, 여자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해야 된다는 것이 응급처치법의 제 1원칙이다.

여자가 당황하거나 항의하면 나는 ‘미안합니다. 데이트를 하면서 키스를 하지 않으면 실례라는 말을 들어서.’ 라며 마치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키스를 했다는 식의 뚱딴지를 쳤다. 키스를 점잖게 하지 않고 입술에 타박상이 생길 정도로 아프게 했다면, 나는 당신이 예뻐서 키스를 했으니까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며 아가씨에게 반격했다.


낭만적으로 핑계를 댈 수도 있다. 동방월출東方月出에 침자질하면 고전적이지만, 이방저방에 서방질하면 현대적인 낭만이 흐른다.
달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달에게 키스하려는데 이것이 불가능해서 사랑하는 아가씨에게 키스했다는 데는 반박할 웅변이 있을 수 없다.

엄격히 말해서 키스는 정이 통하면 아무 때나 해도 상관없다. 해가 솟으면 해 때문에 키스를 하고 달이 떠오르면 달 때문에 키스를 하고 기분이 좋으면 신나서 키스를 한다. 키스는 인삼과 같이 만병통치약이다. 키스는 간사한 웅변의 입을 막고 정을 통하게 하는 침묵을 상징한다. 이리하여 나는 대학시절에 공부는 하지 않고 데이트에 미쳐 간신히 낙제만을 면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모사꾼인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사실은 정 반대였다. 데이트의 진수는 진실함에 있다. 데이트가 연애로 발전하자면 꾀는 추진력이라기보다는 저지력이 된다. 나는 나의 가슴을 열었다. 일단 여자와 만날 기회가 마련되면, 나는 당신과 같이 착하고 평범한 사람이란 것을 나의 심장, 나의 폐, 나의 밥통, 나의 창자, 나의 콩팥을 벌려서 보여주었다.
여자들은 나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데이트 성공의 비결은 스스로의 사람다움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데 있다. 처음 보기에 아무렇게나 생긴 여자도 마음이 착하면  점점 아름다워 보인다.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처음에는 그의 얼굴을 보지만 한 번 만나고 두 번 만나면 우리는 그의 마음을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추녀가 천사가 되고, 미인이 마귀로 전락할 수도 있다. 끝나는 미美는 선이요, 원근미가 된다. 이런 뜻에서
나는 오로지 진실하고 착해야만 연애에 성공할 수 있다고 단정 짓고 싶다.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이 나에게 준 가장 큰 혜택은 데이트를 통해서 내가 희망 없는 못난이라는 열등의식에서 해방되었다는데 있다.
미국 여자들이 나를 받아들이고 좋아하고 사랑해주었을 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종교인처럼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
한국에서 꽤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수줍어했던 나는 미국 천사들의 격려를 통해 말을 마구 하게 되었고, 끝내는 거룩한 주책바가지가 되었다. 물론 공부를 잘해 박사가 되고 결혼하여 애를 낳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순전히 재미, 멋, 스릴이란 관점에서 볼 때 세상에서 데이트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사실 이 글을 쓸까말까하고 심히 망설였다. 아내가 역겨워하면 어쩌나 하는 것보다도 미국에서 데이트를 잘했다는 이야기는 9분 47초만에 새 피아노를 망치로 산산조각냈다는 세계 기네스 기록처럼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를 잘 아는 미국의 한국 친구들이 이 글은 꼭 쓰라고 신신당부해 왔다. 결혼상담이 성직보다 더 성스러운 직업이라면, 하긴 데이트 요령을 풀이하여
수많은 청춘남녀들의 위경련을 고쳐주는 것도 거룩한 자선사업일 수 있다. 미국 켄터키 주의 처방이 풍조가 다른 한국 사회에서도 그 약효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까? 남성 위주로 쓰여진 이 처방이 여성들에게도 도움이 될까? 자화자찬하길 좋아하는 나는 이 글의 메시지는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처럼 성과 풍토를 초월했노라고 큰소리치고 싶다.

데이트 요령을 자동차를 모는 데 비유하여 요약해본다. 데이트의 진미는 1단에 용기를 넣고, 2단에 파나슈를 넣고, 3단에 진실을 넣고, 4단에 기어를 오버 드라이브에 넣은 다음 씽씽 달리는 차 속에서 눈부시게 지나가는 인생 풍경을 감상하는 데 있다.

- 전시륜 저,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中,'데이트하는 요령'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5 11:5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