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18)> 산티아고 순례길 20일차

웃음·연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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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등록일 : 2019-04-12 15:38:28 | 글번호 : 191155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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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지루했던 초등학교 시절, 애국조회 시간에 나는 운동장을 파곤 했다. 주변의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고 박혀 있는 돌을 하나씩 파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어느 새 파낸 돌들은 수북히 옆에 쌓였다. 그렇게 아기 주먹만한, 혹은 바둑돌만한 돌 두 세 개를 파낼 때쯤이 되면 으레 담임선생님의 따끔한 꾸지람이 들려왔고, 그 따끔한 꾸지람에 파냈던 돌을 모두 도로 묻으면 말씀이 유난히 기시던 우리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끝나곤 했다. 초등학생 치고 키가 컸던 나는 매번 우리 반 줄 맨 뒤에서 그 다음 주에도, 또 그 다음 주에도 땅을 팠다. 그 지난주에 묻은 돌 중 제일 늦게 묻은 돌은 금방 파낼 수 있었지만 맨 아래 있는 제일 처음 묻은 돌까지 파기 위해서는 꽤나 힘과 시간이 들었다. 한 주 간 얼마나 많은 발들이 그 돌 위로 지나갔을까. 축구화 한 발짝 운동화 한 발짝이 그 위를 즈려밟고 지나갈 때마다 돌은 점점 깊이 묻혀 갔을 것이다.

어느 날 축구를 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친 적이 있다. 내가 돌을 묻은 그 때 그 자리는 아니었지만 왠지 누군가가 내가 어설피 묻은 돌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이후부터는 땅 파내기를 그만두었다. 그때의 기억 탓이었을까, 나는 내 마음 속의 돌들도 깊이 묻는 버릇이 생겼다. 누군가가 내 마음 속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가 나도 꾹 참았고, 기뻐도 꾹, 슬퍼도 꾹꾹 참았다. 신중히 마음 속 돌들을 묻었지만 가끔은 채 다 묻지 못한 돌부리가 튀어나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좀 더 돌을 깊이 묻지 못한 나를 탓하며 어쩌다 걸려 넘어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기를 십 수 년, 나는 슬퍼도, 감동 받아도, 기뻐도 덤덤한 호수 같은 사람이 되었다.

동시에 나는 겁쟁이가 되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이냐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용감히 나섰던 일에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을만한 일도 없었다. 그럴만한 욕망과 생각은 혹시나 튀어나와 타인들 혹은 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힐까 깊이 묻어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라앉은 욕망과 생각들은 속 안에서 썩어 문드러져 스스로를 해했다.

이곳에 와서는 한창 묻혀있는 돌을 파내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길을 걸으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본연의 모습을 내보이며, 가고 싶으면 가고 멈추고 싶으면 멈춘다. 행복하다. 겹겹이 쌓인 사회적 가면과 조미료처럼 약간의 거짓을 뿌리고 살던 한국 사회에서는 언제나 가슴 한편이 답답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할 때면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그렇게 되었다. 적어도 3km 반경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은 평야를 걸으며 마음껏 소리치고, 노래를 부르고, 미친 듯 웃기도 해본다. 길을 가다 마음에 드는 바가 있으면 아침부터라도 들어가 맥주 한 잔과 또띠야를 시킨다. 어쩌다 마주치는 낯선 이가 있으면 나 자신의 가면 없는 모습을 내보인다.

쉬운 일이지만 쉽지 않았다. 분명 주변엔 아무도 없지만 홀로 걸을 때의 침묵을 깨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모두의 앞에 에스프레소와 카페 콘 레체가 놓여 있는 오전 8시에 암스텔 맥주 큰 잔을 시키는 것 역시 주정뱅이로 보이기 십상이다. 가면 없이 나를 내보여본 적이 드물기에 가면을 벗으면 알몸으로 상대를 대하는 기분이 든다. 동시에 얼마나 내가 주변의 시선에 얽매여 있었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가면을 오랜만에 벗으니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지만 동시에 그간 너무 오래 묻혀있었던 피폐한 맨 얼굴이 드러나 안타까웠다. 점점 내 안의 돌을 파냄과 동시에 돌을 묻어야 한다는 강박, 가면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해방되려 노력중이다.

오늘의 길은 평탄한 작은 자갈밭들이 이어진 길이었다. 돌들은 땅 위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하지만 용서의 언덕 내리막과 달리 걷기 어렵지는 않았고 어제 무리한 덕에 덜렁거리기 시작한 내 왼쪽 발목에게도 나쁘지 않은 길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돌이 길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도 누군가를 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오히려 자갈 위를 밟고 다지다보면 어느새 돌들이 적당한 깊이로 들어가 예쁜 자갈길로 변해있지 않겠냐고.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5 17: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