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위에서 까미노와 그 주변을 바라본다면 퍽 흥미롭겠다. 희고 빨갛고 노랗고 검은 점들은 검은 도로를 빠르게 달린다. 그 옆에는 작은 점들이 달팽이마냥 느릿느릿 움직인다. 방향은 비슷해보인다. 느린 점들은 제각기 다른 시간에 같은 곳에서 나와 중간중간 멈추기도, 서로를 추월하기도 하면서 해가 서서히 내려갈 무렵 비슷한 곳으로 모여든다. 하늘 위 관찰자가 있다면 빠르게 갈 수 있는데 저 점들은 왜 굳이 줄지어 저렇게 천천히 움직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빠름에 집착하곤 했다. 초등학교 때는 빨리 중학생이, 중학교 때는 고등학생이, 고등학생 때는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학창시절 시험을 몇 분 빨리 푼다고 하여 가산점을 주는 것도 아닌데 문제를 빨리 풀어버린 날에는 기분이 좋았다. 사랑하는 이와 만날 날을 기다리던 때는 빨리 안 가는 시간이 야속했다. 꿈에서라도 어서 그녀를 만나려고 야행성인 내가 열 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꿈에는 늘 그가 나와 조금이나마 빨리 만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재수를 결정한 이후 내 시계는 가끔씩 멈추었다. 재수 일 년, 휴학 한 학기, 군대 이 년, 다시 휴학 일 년. 그렇게 살다보니 제일 빠른 내 또래들보다 무려 4년을 느리게 살았다. 사실 스무 살에는 대학을 가야하고 적어도 스물 여섯에는 졸업하여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혹은 적어도 뭐라도 하고 있어야 한다고 그 누구도 정해놓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나가고 있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짐짓 괜찮은 척 해도 괜히 가슴 한 켠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분명히 고등학교때까지 제일 빠른 것은 나였는데.

빠른 것을 좋아하지만 이 곳에서는 어쨌든 느리게 가야한다. 오늘처럼 도로와 평행하게 걸을 때는 새삼 차가 얼마나 빠른지 느끼게 된다. 지평선을 보며 30분쯤 걸리겠지 하고 있으면 내 옆을 지나간 차는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 지평선에 가 있다. 허무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인생으로 따지면 9살 때 미적분을 마스터한 폰 노이만을 보는 느낌이랄까.

반면 어떤 것들은 그래도 힘을 내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갈 길이 멀어 오랜만에 아침 일찍 출발했다. 남들이 모닝커피를 내리고 있을 때쯤 배낭을 지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동녘에는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건물에 가로막힌 아래쪽 하늘이 보고 싶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소 느긋해진 마음과 연이어 흐렸던 날씨 때문에 일출을 길 위에서 보는 것은 오랜만이라 설레기 시작했다. 도로로 나가면 일출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서둘렀지만 아쉽게도 마을을 빠져나가자 붉은 기는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나는 해 뜨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부쩍 추워졌는지 길을 걷다보니 양쪽 길가 풀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것이 보였다. 오늘 첫 마을까지는 17km라는 꽤 긴 거리를 걸어야 한다. 3시간쯤 걸릴 거리지만 나는 빠른 것이 좋으니까 빠르게 걸었다. 아마 빠르게 도착할게다. 어쩌면 오늘 목표한 30km를 넘어 40km를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양쪽으로는 익숙한 풍경이 제법 빠르게 지나간다. 하얗게 언 풀이 제 색깔을 찾을 무렵 첫 도시에 도착했다. 시간도 점심 시간에 가까웠고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걸었기에 좀 오래 쉬었다. 1시간 10분쯤 쉬다가 다시 걸으니 내가 나올때 커피를 내리고 있던 마일리스가 앞에서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따라잡으려 했지만 마일리스는 빨랐다. 이번에도 나는 마일리스를 따라잡는데에 실패했다.

오늘 벌써 따라잡기를 두 번이나 실패했다. 첫날 제 페이스대로 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앞에 누군가가 있으면 발걸음이 괜히 빨라지는 것을 보면 아직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으로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적어도 이제 내가 빠르지 않다고 분해하지 않음에 만족한다. 이만 해도 수 일 간 끝이 없는 메세타 고원을 걸으며 얻은 큰 수확이다.

내 글을 보고 많은 이들이 길을 걷는 내게 말한다. 길을 끝내고 절간에 들어가거나 수도원에 들어가는게 아니냐고. 농담조로 사람일은 모르니 그럴 수도 있다고 대답하긴 하지만, 그리고 분명 이 길에서 하나씩 나도 모를 것들을 내려놓고는 있지만, 아직 모든 것을 내려놓기에 내 욕심은 너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확실히 속도에 대한 욕심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고 있는 것 같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18: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