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도 참 글러먹은 인생이다. 올해 휴학을 하고 교재를 두 편 쓰고 유투브를 시작하려 계획을 세웠다. 여름방학 동안 진로가 뒤틀리며 기껏 만들었던 교재 두 편이 별 도움이 되지 않게 되었다. 7년 간 써온 교재는 컴퓨터 속 관련 없는 파일 두 개로 남았을 뿐이다. 군대는 또 한창 잘 나가던 2014년 겨울에 갑자기 끌려갔댔지. 위약금까지 물지는 않았지만 들어왔던 합숙과외비가 한꺼번에 통장에서 빠져나갈 때는 가슴도 텅 비었다.

좀 더 먼 과거를 돌아볼까. 현역 때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가겠다며 포기하고 재수를 택했던 고려대를 재수까지 하면서 1년간 휘 돌아왔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세운 계획으로는 나는 문과에 있으면 안 됐지. 변리사가 되고 싶었으니까. 반면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려 본다면 나는 지금쯤 문과도 이과도 아닌 신학생이었을 것이다. 여태 인생에서 계획을 세웠을 때 이유가 어떻든 정말 계획대로 된 것은 오직 2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던 것 같다.

오늘도 뿌연 안개 속을 걸으며 마치 내 인생처럼 글러먹은 길이라 생각했다. 청명한 날에는 어디서부터 오르막이 시작될지, 어디서 쉬면 좋을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단지 몇 걸음 앞을 제외하고는 당최 어디서 쉬어야 좋을지, 앞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수돗가에서 물을 채워야 하는데 생각보다 길이 걸을만 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수도는커녕 벤치도 없는 산길로 들어섰다. 안개가 자욱한 길은 계획을 세워도 확실치 않으며 가끔은 계획을 세우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일이 되는 길이다. 만일 바로 앞에 산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산길로 들어서기 직전 마주친 수돗가에서 물을 채웠을 텐데.

안개 속 산길은 한 술 더 뜬다. 분명히 나는 오늘 해발 1400m 가까이 올라가야한다. 그러나 미심쩍은 화살표 하나가 내리막으로 나를 이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이 안개 속에 의지할 것은 오직 화살표이다. 게다가 화살표를 무시했다가 트럭에 치여 비명횡사할 뻔한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아무리 미심쩍어도 화살표를 따를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오르막이 펼쳐진다. 평소 같으면 위를 보며 저 정도만 올라가면 되겠다 가늠이라도 해보지만 보이는 것은 안개 뿐이다. 얼마나 올라가야 그나마 숨을 돌릴 평지가 있을지, 마을이 있을지, 아니면 끝없는 오르막의 연속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저 오를 뿐이다.

이틀 전 철의 십자가에서 폰페라다로 내려올 때 바다처럼 깔려있던 안개가 바로 이 안개다. 겉으로 봐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처럼 안개도 밖에서 봤을 때는 평화롭고 신비하기만 했다. 하긴 크루즈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것과 천 길 물 속은 다른 것이 당연하다.

계속 오르다보니 다행히 점점 안개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저 흐린 날인 줄로만 알았는데 오르면 오를수록 하늘은 푸른 기가 돌기 시작했고 결국 올라선 안개 위에는 파랗고 높은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산길을 걸은 이후 첫 마을과 마주하게 되었다.

마을에는 그토록 바랐던 음수대와 애교가 넘치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음수대에서 목을 축이고 유난히 경계심이 없던 고양이를 쓰다듬어주며 지금껏 걸어온 길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안개는 마치 그릇에 담긴 우유처럼 분지에 온통 하얗고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두껍게 발 밑을 메꾼다. 초콜릿 한 조각을 먹고 다시 힘을 내서 걷기 시작했다.

시야가 확 트인 오르막은 훨씬 걷기 편했다. 힘들 때는 옆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하늘을 보며 걸으면 된다. 산을 오른다기보다는 그림 속으로 점점 걸어들어간다는 느낌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잠깐 숨을 돌리고자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니 생전 본 적 없던 풍경이 앞에 펼쳐졌다. 안개 바다 위에 산 봉우리가 섬처럼 솟아있다. 걸어온 황톳빛 길은 바다로 이어진 모래사장 같다.

시간이 멈추었다. 그림 안으로 걸어들어가 결국 그림이 되어버린듯 나조차 감히 움직일 수 없었고 움직이는 것은 오직 일렁이는 안개 물결뿐이었다. 풍경을 담고 싶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지만 만족할 만한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 메세타 고원의 광활함처럼 그저 마음에 깊이 새기기로 했다. 오르막을 오르느라 가빴던 숨이 평온해진지 오래여도 자리를 떠날 줄 모르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오리무중이던 안개를 뚫고 미심쩍은 내리막과 오르막을 반복하다보니 내가 걸은 길은 아무도 모르게 나를 이 곳까지 이끌었다.

마을간의 거리와 고도는 정해져있다. 그러니 내리막이 있으면 그만큼 더 오르면 되는 것이고, 내리막을 걷는 와중에도 나는 다음 마을과 한 걸음씩 더 가까워지는 셈이다. 길이 내리막이든 오르막이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정표를 잘 따라가는 것 하나 뿐이다. 설사 그 길이 안개 속에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올라가는 것이 맞지만 나를 내리막으로 인도하는 글러먹은 길일지라도 목적지로 이끄는 이정표만 있다면 내 길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글러먹은 인생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지만 내가 지금의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작년 이 맘때쯤 기회가 닿아 거의 백 명에 가까운 고등학생 앞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꿈을 찾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 하나하나를 돌아보라는 것이 강연의 핵심이었다. 발자국에는 주인의 많은 것이 담긴다. 발 사이즈, 걸음 습관, 심지어 주인이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도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다. 현대 범죄 수사에서 발자국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이다. 이처럼 지금 당장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해도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 속에는 자아가 담기기 마련이다. 자신도 몰랐던 사소한 취향부터 가치관까지 과거의 발자국을 돌아보면 알게 되어 있다. 그 속에서 교집합을 찾는 것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이를 찾는다면 당신은 당신의 꿈을 찾은 것과 다름없다고 나는 힘주어 말했다. 비록 그때 확고하던 나의 목표는 올해 아주 조그만 파문 하나로 인해 무너졌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자기 자신에 충실했던 발자국들은 믿을 만한 이정표가 된다. 나의 발자국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이 나의 발자국들은 나를 내가 가야할 곳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해야할 것은 이정표에 맞추어 발자국 하나하나를 찍어가는 일 그 뿐이다. 이정표만 제대로 되어있다면 꿈이 무너지더라도 새로운 꿈의 새싹이 자라게 된다. 오르막이어야 하는 길이 내리막일지라도 결국에는 올바른 마을로 이끄는 것과 같다.

그렇게 보면 글러먹었다는 표현은 아예 맞지 않다. 원체 욕망에 충실하던 인간이었고 좌충우돌 살던 인간이었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대로 발자국을 찍어왔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영어 사교육에 7년 가까이를 투자해왔지만 한순간에 던져버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럼 이제 뭐할거야? 아깝지 않아?" 그럴때마다 웃으며 답하곤 한다. 아깝긴 하지만 다 계획이 있다고. 사실 반은 맞고 반은 뻥이다. 전혀 아깝지 않다. 그 7년의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치열히 살았고 내 뒤에는 지극히 나다운 발자국이 찍혔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나다운 계획을 하고 있다. 이번에도 내 글러먹은 인생이 빛을 발해 계획을 망가뜨린다 해도 이정표만 온전하다면 문제가 없겠다.

어제 만난 이들에게는 15km를 걸어 오 세브레이로까지 가겠다 했지만 원래 오늘 아침에 변경한 계획은 그보다는 멀리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풍경을 보며 걷다보니 풍경을 내 마음 속에 담는 데에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안개 바다가 보이는 오 세브레이로에 묵기로 했다. 역시 글러먹은 이의 길은 글러먹을 수밖에 없다. 숙소를 잡았다. 숙소에는 욕조가 있다. 오랜만의 반신욕으로 노곤함을 풀고 근처 바에 들어가 맥주 한 잔과 갈리시아식 고기파이를 시켰다. 맛있었다. 해넘이 사진을 찍다 미사 시간이 되어 이상할 정도로 북적이던 성당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산골마을 성당에 무슨 사람들이 이리 많이 모였나 싶었다. 오늘 유명한 뮤지컬 배우가 참석해서 성가를 부른단다. 귀가 호강한다. 미사가 끝나고 식당에 들어가보니 소갈비를 10유로에 판다. 맥주와 함께하니 맛은 역시 끝내준다. 인생이 글러먹은 덕에 누리는 호사가 많다.

파울로 코엘료는 첫 순례 여행 중 이 곳 오 세브레이로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글쎄. 나는 아무래도 평범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다. 큰 깨달음은 모르겠고, 조금은 인생이 계획한 대로 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조그만 사실 하나는 다시 확인한 것 같다. 내일은 오늘의 안개바다 위로 태양이 뜰 것이다. 내일 어디까지 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늦게 일어나 일출을 충분히 즐기다 걷기 시작할 생각이다. 인생이 글러먹었다 싶은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4 16:2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