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20)> 산티아고 순례길 2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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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등록일 : 2019-04-14 09:36:08 | 글번호 : 191349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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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안정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도전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인간관계에서는 도전을 안 하는 편이지만 내 자신에 대해서라면 나는 후자에 가깝다. <포레스트 검프>를 보고 감명 받은 나는 지쳐서 더 이상 한 발짝도 못 갈 때까지 걸어보기를 원했고 며칠 전 50km를 걸음으로써 버킷 리스트 하나를 달성했다. 하루에 50km를 걸었다고 누가 메달을 걸어주는 것도, 어마어마한 성취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남는 것은 오직 아픈 발 뿐과 술자리 안주거리 하나 정도 뿐일텐데 왜 나는 그토록 탈진할때까지 걷고 싶어했을까?

무리하게 50km를 걸은 탓인지 결국 탈이 났다. 불안불안하던 왼쪽 발목 앞이 조금만 걸어도 아프다. 사실 50km를 걸은 다음 날 레온까지의 20km 중 마지막 5km는 거의 기다시피 왔다. 레온에서는 원래 하루 쉴 예정이긴 했지만 3일차인 오늘 아침이 되어도 발목이 아물지 않아 하루 더 쉬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쉬는 김에 어제 제대로 보지 못했던 가우디의 건축물 Casa Botines를 볼 것이다.

느긋해진 나 자신을 발견했다. 초반만 해도 하루하루 걷는 것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확실한 맺음 없이 쉼표를 남발하는 문장이 매력 없듯 그런 여정도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쉼표가 있다면 다음 찍는 점은 온점이어야 했다. 도보 순례이니만큼 하루의 끝은 지쳐 잠드는 것이 맞다고 여겼고 다음 날 몸 중 어느 부분이 아프지 않다면 어제 더 걸을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라도 쉬는 날이 있으면 패배자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하루 더 쉬자 했던 것은 스스로에게 있어 놀라운 일이었다.

아침을 주섬주섬 챙겨먹고 소염 진통제를 먹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잠시 자고 일어나자 발목 통증이 완화된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오늘은 쉬는 것이 좋겠다. 숙소 비용을 처리하고 다시 돌아와 누워 어제 못 다 쓴 글을 마치고 다시 조금 잤다. 잠이 많은 편이 아닌데 이상하게 그 간 피로를 보상하려는 듯 잠이 쏟아졌다.

우리는 늘 기회비용과 함께한다. 짬뽕을 먹을까 짜장을 먹을까 고민할 때는 짬짜면을 시키면 되지만 인생에는 짬짜면이 없다. 까미노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 43km를 걸은 후 마지막 6.6km를 더 걸을까 말까 할 때 나는 다시 한번 선택해야만 했고 나는 6.6km를 더 걷기로 선택했다. 그 결과 그 날 저녁부터 오늘까지 4일 동안 덜렁이는 왼쪽 발목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셋째날 주비리에서 팜플로나로 올 때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하고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걸어온 길 중에 두 갈래 길이 참 많았다. 선택한 길이 평탄할 때도, 예상치 못한 언덕을 만나 당황할 때도 있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후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정은 또 다른 가정을 낳는다. 로또를 살면서 몇 번 사보았다. 인생이 힘들 때였다. 한 번은 4등에 당첨되기도 하고 한 번은 번호 세 개는 맞았지만 나머지 세 번호가 다 숫자 하나씩 빗겨나간 적도 있다. 그 때는 한 장씩만 산 것을 후회했다. 그래서 한번은 오만원 어치를 사보았다. 결과는 오만원 어치 모두 꽝이었다. 4등 당첨되었던 것이 한번에 다 날아갔다. 그러자 오만원 어치를 산 것이 후회가 되었다.

더 뒤돌아본다면 애초에 오만원으로 만족했더라면, 그 이후 오천원 더 번 것에 만족했더라면, 아니면 로또를 아예 사지 않았더라면, 아니, 쪼들리지 않게 그때 후배들에게 쏘지 말 걸, 아니, 과외가 하나 더 들어왔을때 받을 걸, 아니, 그때 라멘에 차슈 추가를 하지 말 걸 하는 연속된 후회로 이어진다. 아마 그 순간 나를 구원해줄 수 있었을 것은 로또 1등이었겠지만 그 이후에도 내 후회는 계속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계속 후회할 것을 만들어낸다. 후회는 미래의 실수를 방지할 수 있는 거울이 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유용한 것이라도 짐이 되는 이 까미노에서 후회마저 내려놓지 않으면 한 발짝을 더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온고지신이라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직 현재에만 집중하자고 다시 다짐을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에서 피어오르는 먼지와 내뱉고 마시는 숨결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까미노를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버스를 타도 좋다. 걸어야 하는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배덕감이 들겠지만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질주하는 것은 행복할 것이다.

만씨야에서 만난 스페인 아저씨 F랑 잘 못하는 스페인어로 대화를 했다. F는 자유를 찾아 이 곳에 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자유를 찾아 이 곳에 온 사람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모든 결과가 오로지 내 의지 하에 있으면 된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윤리를 선택했다. 암기하는 것이 싫기도 했고 기라성같은 여러 철학자들에게 매료된 덕이기도 하다. 데카르트와 베이컨, 그리고 칸트와 쇼펜하우어. 이들이 모이면 주제가 무엇이든 칼날같은 제각기의 논리로 꽤 재미있는 대화가 오갈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매료된 이유는 그들의 사상이 매력적이어서가 아닌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 자신의 세계 속에서는 모든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이 가능하겠지.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은 자신의 의지와 생각 속에서 나온 대답. 그것을 나는 갈구했다. 내 세계를 쌓고 그 안에서 모든 의문에 대해 내 식대로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랐다.

노력한 지 십 년 가까이 흘러 이제는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해 나만의 대답과 이유를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세계에 맞추어 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내가 A라고 생각해도 B라고 행동해야 정답이 되는 것이 이 세상이었다. 사회로 뛰어든 후에는 나의 생각과는 상관 없이 나의 정답이 아닌 세상의 정답을 좇았다. 나의 행동은 내 의지대로가 아닌 것들이 많았다.

돌아가면 다시 세상이 제시해주는 정답에 맞추어 살지도 모른다. 새벽 6시 반에 일어나 7시까지는 샤워를 마치고 7시 반에는 지하철을 타고 8시 반까지 수업 장소 근처에 도착해 9시까지 수업 준비를 마무리 할 수도 있다. 비록 그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일단 먹고 살아야 의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생 중 얼마 안 될 이 기회 역시 세상의 의지에 따라 걸으며 소모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오로지 나의 의지에 따라 쉬고 걸으며,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라며 자신의 의지에 마치 반했던 것처럼 변명을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내가 만들어가는 까미노가 의미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 길의 반이 넘게 지난 지금, 이제야 이 사실을 깨닫고 이대로 따라 걸으려 한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5 10:3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