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같은 배우와 가수들을 볼 때도 호불호가 갈리는 이 세상에 맛있는 음식만큼 모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을까. 한국에서 이 지역 저 지역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업이다보니 맛집 탐방은 내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였다. 마라톤 수업을 마치고 근처 맛있다는 집에서 점심 또는 저녁을 때우면 다시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힘이 나곤 했다. 그러기를 수 년 간 하다보니 백종원 씨 같은 미각을 갖추지는 못했어도 범인들에게 먹힐 만한 웬만한 서울 맛집은 어느 정도 꿰고 있게 되었다.

한정적인 지역이 아닌 서울 전역, 때때로는 경기도까지 갈 일이 있다보니 어느 새 내게 새로운 지역은 새로운 맛을 뜻하게 되었다. 그렇게 부푼 가슴을 안고 이번 여행길에 올랐다. 제 아무리 서울에 전 세계 음식이 모두 모여있다 할지언정 그 모든 음식이 현지 식재료로 현지의 셰프가 만든 요리에 비할 수 있을까.

에스까르고의 낭만이 있던 파리의 Aux Artistes,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비아리츠의 L'entre deux, 내게 첫 타파스 경험을 주었던 팜플로나의 Bar Gaucho, 타파스의 신세계를 보았던 부르고스의 La quinta del monje. 모두 하나같이 뛰어난 맛집들이었다. 적어도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그랬다. 충분히 이국적이면서 입맛에 맞았다.

여태껏 대도시에서는 늘 미각이 만족스러웠기에 이번 도시인 레온에서도 큰 기대를 했다. 절뚝거리며 도착해 서둘러 짐을 풀고 눈만 조금 붙인 후에 절뚝거리며 맛집 탐방에 나섰다. 벼르고 벼르던 스페인식 수육인 꼬시도를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레스토랑에 가보니 저녁에는 수육을 안 한다고 해서 내일로 예약을 잡아놓았다. 대신 타파스 투어를 하기로 했다. 이미 해외 잡지사 칼럼과 여러 가지 경로로 조사는 끝난 후였다. 점 찍어둔 타파스 바를 하나씩 돌았다.

첫 번째 바는 돼지 귀 조림이 있다던 Napoles였다. 꽤나 변두리에 있었음에도 북적이던 바에는 역시나 모두가 앞에 돼지 귀 조림과 와인 혹은 맥주를 늘어놓고 있었다. 나 역시 돼지 귀 조림과 맥주 한 잔을 시켰다. 삼삼한 간이 배어있는 쫄깃한 돼지 귀와 오독거리는 연골의 조화가 좋았다. 신기한 음식이긴 했지만 맛은 기대가 컸던 탓인지 기대만큼 만족스럽진 않았다.

두 번째 바는 모든 추천선에 올라있던 Jamon Jamon이었다. 트립어드바이저는 이 바를 레온의 타파스 바 중 제일로 내세우고 있어 제일 기대하던 곳이기도 했다. 하몽과 초리조를 시키고 역시 맥주 한 잔을 시켰다. 맛있는 하몽과 초리조긴 했지만 이번에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부르고스에서 오를대로 오른 타파스 바에 대한 기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 번째 바부터는 현지인들이 많이 모여있는 바를 가기로 했다. 생 마르틴 광장 쪽으로 이동하며 북적이는 아무 바나 찾아 들어갔다. 세 번째 바의 치즈버거. 기름진 쉑쉑과 다운타우너에 길들여진 나에겐 인상깊지 않았다. 가성비는 좋다. 네 번째 바의 스페인식 마늘수프 소파 드 아호. 한국의 내장탕과 비슷한 맛과 생김새지만 뭔가 부족하다. 다섯 번째 바의 안초비 핀초와 틴토 데 베라노. 비린내 없이 잘 숙성시킨 안초비는 부드러웠지만 이 역시 감탄할 정도는 아니다.

실망이 컸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타파스는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일상이다. 한국에서 점심시간이 되면 밥집에 들어가 된장찌개를 먹고 제육볶음을 먹듯이 이들은 저녁이 되면 바에서 타파스와 와인 또는 맥주를 집어들고 이야기 나누기를 즐긴다. 타파스의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하지만 몇몇 실험적인 바를 제외하고는 대개 비슷한 것 같다. 한국 밥집에서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은 평범한 메뉴지만 분명 맛집은 있는 메뉴다. 그렇지만 외국인이 처음 접할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은 평범한 메뉴가 아닌 특이한 어떤 메뉴일 것이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특이하고 다양한 메뉴를 많이 먹어보고 싶지만 현지인들은 익숙한 맛 중 최고의 맛을 원한다. 어쩌면 오늘 내가 먹은 하몽 한 조각은 이들에게는 감히 다른 곳에서 먹는 하몽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맛있는 하몽 한 조각일 수도 있겠다. 다른 바의 소파 데 아호와는 달리 오늘 내가 먹은 소파 데 아호가 쇠고기를 푹 삶아 잘 우려낸 최고의 소파 데 아호일 수도 있겠고. 이런 생각이 들면서 다시 먹었던 타파스를 돌아보게 되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산뜻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맛있었다. 나의 타파스 투어는 실패하지 않았다.

땡땡해진 배를 안고 돌아왔다. 별 수확은 없었지만 내일은 예약 없이는 먹기 힘든 스페인식 수육을 먹겠다는 기대에 가득 차 잠자리에 들었다.

꼬시도의 날이 밝았다.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돌아다니다보니 현지인들이 줄 서있는 츄러스 가게가 보였다. 산티아고 순례길 단톡방에서 추천받은 곳이기도 하다. 발바닥만한 츄러스가 고작 하나에 15센트밖에 안 한다. 20분을 기다려 먹은 츄러스는 뜨겁고 바삭했다. 환상적인 가성비와 맛이었다. 단지 추러스를 먹었을 뿐인데 꼬시도에 대한 기대가 다시 하늘을 찔렀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츄러스로 부른 배를 잠재우다 오늘 같이 꼬시도 식당에 가기로 한 K형을 만나 꼬시도를 먹으러 갔다. 첫 손님인지라 가게 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러나 메뉴가 하나하나 나옴과 같이 현지인들로 채워지는 테이블을 보며 참 잘 왔다 생각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식사 시간은 길다. 정식 레스토랑에 가면 어디든 코스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메인 메뉴가 나오려면 첫 메뉴가 나온 후 30분은 족히 흘러야 한다. 소파 데 아호와 모르씨야 속, 찐 렌틸콩, 정체를 알 수 없는 야채볶음이 차례대로 나왔다. 혹시 메인인 꼬시도가 나오기도 전에 배가 불러버릴까봐 걱정스러워 조금씩만 먹었다.

그리고 드디어 어젯밤부터 무려 16시간을 기다린 꼬시도가 나왔다. 돼지의 여러 부분을 삶거나 찐 요리다. 생김새는 흡사 한국의 모듬수육 같다. 머릿고기, 껍데기, 지방, 귀, 다릿살까지 다양하게 있다. 맛도 간이 되어있는 모듬수육과 비슷하다. 그런데 짜다. 처음에는 맛있었으나 몇 점 집어먹으니 어마어마하게 짜고 기름지다. 주변을 둘러보니 찐 렌틸콩을 밥 대신 곁들여 먹는 것 같다. 그런데 찐 렌틸콩마저 짜다. 스페인 음식이 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지금껏 별로 와닿지 않았었다. 오늘에서야 제대로 느꼈다.

주변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계속 들어와 식당 안을 가득 메웠다. 이렇게 현지인들이 즐겨찾는 집이라면 현지 맛집이 맞긴 하다. 다만 삼삼한 수육을 김치에 싸먹고 밥을 꿀떡 넘기는 한국인 입맛에 잘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만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곳까지 와서 갓 쪄낸 따끈한 수육에 김치와 쌀밥을 떠올리는 것이 한심해보이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현지의 맛은 톡톡히 본 셈이다.

맛은 꽤 주관적이다. 누구에게나 맛있는 음식도 있을 수 있겠지만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들도 있다. 나는 홍어를 세 번은 도전해보았지만 아직도 못 먹는다. 반면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생굴을 아예 못 먹는 사람도 허다하다. 심지어 같은 음식이라 할 지라도 간이 어느 정도면 적당한지 어느 정도로 매운 것이 좋은지에 대한 인식이 갈린다. 같은 문화권에서도 이럴진대 다른 문화권의 음식에 대한 호불호는 더욱 심하겠다. 스페인의 맛집이 나에겐 맛집이 아닐 수 있고 한국의 맛집이 외국인들에게는 맛집이 아닐 수 있다.

저녁에는 동양마트에서 장을 봐서 오랜만에 고추장찌개와 라볶이, 냄비밥을 했다. 거진 한 달 만에 먹어보는 한식이다. 칼칼한 국물에 촉촉한 쌀밥을 오랜만에 먹으니 속이 한순간에 풀렸다. 그런데 식사를 함께 한 대만 친구 C에게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매웠나보다. 왜 한국인들은 이렇게 매운 것을 좋아하냐며 라볶이를 하다 남은 라면 사리와 밥에 고추장 찌개를 조금씩 뿌려먹고 있었다. 오늘 점심 레스토랑에서 너무 짠 꼬시도에 정신을 못 차리던 내가 오버랩되어 웃음이 나왔다.

별 특이할 것이 없는 타파스 바를 돌아다니고 너무 짠 꼬시도에 정신을 못 차렸지만 여행 중에는 그마저도 낭만이 된다. 남은 한 달 여 기간 동안에는 열심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현지 식당들을 돌아다녀볼 생각이다. 소금 덩어리 같은 돼지 수육을 만나고 실망할 수도, 어쩌면 때때로 이국스러운 미식을 즐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여행의 일부분이 된다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여행에서 먹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생존 이상의 의미가 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6 07:0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