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먹 쥐고 일어서
사각 링 위에서 두 사나이가 두 주먹을 치켜든 채 서로의 빈틈을 살핍니다. 찰나의 순간 강력한 일격이 가해지고 장정의 육체가 허수아비처럼 무너지고 맙니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종이 시끄럽게 울리고 관중의 환호는 경기장을 뒤흔듭니다. 승자는 터질 듯이 뛰는 심장, 거칠게 몰아쉬는 숨, 분출하는 아드레날린이 만들어 내는 황홀경에 빠지고 맙니다.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권투의 한 장면입니다.
권투는 여러 격투기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위를 자랑하는 종목입니다. 레슬링과 함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 및 기술을 가장 먼저 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격투기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풋워크, 체급 등 근대 격투기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여러 요소들 역시 권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권투는 높은 접근성을 가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취미 및 건강 목적으로 수련하는 무술이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권투는 많은 매체의 소재로 다뤄졌습니다.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수련 과정, 경기를 치르는 두 선수의 열정 등의 내용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합니다. ‘록키’, ‘밀리언 달러 베이비’ 등의 영화와 ‘더 파이팅’, ‘내일의 죠’ 등의 만화는 자주 회자되곤 합니다. 여러 대전액션게임에서도 권투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캐릭터는 반드시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권투는 대중에게 익숙한 스포츠입니다.


2. 한국 권투의 흥망
산업화 시기 권투는 국민 스포츠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치고 쓰러져도 꿋꿋이 버티고 일어나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곤 했습니다. 높은 인기와 열광적인 응원에 힘입어 여러 선수가 세계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WBC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장정구, 4전 5기의 신화를 쓴 홍수환, WBA 챔피언 17차 방어를 이룬 유명우, 중량급임에도 세계에서 활약했던 박종팔 등은 한국 권투계의 별들입니다.
그러나 현재 권투의 인기는 크게 쇠락하고 말았습니다. 경제발전이 이루어진 후 권투는 고달픈 스포츠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WBA 세계 챔피언에 도전했다가 뇌출혈로 사망한 김득구, WBO 챔피언 방어전에 나섰다가 뇌사 판정을 받고 끝내 사망한 최요삼 등의 사례는 그런 인식을 공고하게 했습니다. 구태의연한 운영과 여러 논란으로 사분오열한 한국권투위원회 역시 권투 인기를 떨어뜨린 주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로 권투는 처참히 몰락했지만 아마추어 복싱은 아시안게임 최다 메달 국가다운 저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러 실업팀이 운영되고 있으며 선수들의 생활이 안정적으로 보장되고 있습니다. 배우임에도 국가대표 선발에 성공한 이시영의 권투 경기는 꽤나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권투가 태권도, 유도 등과 함께 생활 체육으로 가장 잘 보급된 이유 중 하나는 아마추어 복싱의 명맥 유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사각 링의 별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권투엔 수많은 선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중 가장 거대한 이름은 무하마드 알리입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명언으로도 유명한 그는 권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우뚝 서있습니다. 경기 내적으로는 현란한 풋워크와 번개 같은 주먹, 경기 외적으로는 화려한 언변과 사회 문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갖춘 알리는 스포츠 선수를 넘어 위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입니다.
알리가 가장 위대한 권투 선수라면 마이크 타이슨은 가장 유명한 권투 선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후 비행을 일삼다 전설적인 트레이너 커스 다마토의 지도를 받고 세계 챔피언에 오른 타이슨은 ‘핵주먹’이라는 별명과 함께 강렬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비록 커스의 사망 이후 주변의 아첨, 사생활 문제 등으로 인해 일찍 전성기가 끝나버렸지만 타이슨은 알리 이후 가장 화려한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현대 권투의 선구자이자 알리보다도 위대하다고 평가되기도 하는 슈거 레이 로빈슨, 세계 챔피언 25차 방어의 전설 조 루이스, 무패 챔피언이자 영화 ‘록키’의 모티브인 록키 마르시아노, 천재 권투 선수의 대명사 로이 존스 주니어, 1980년대 ‘Fabulous 4’라 불린 슈거 레이 레너드, 로베르토 두란, 마빈 해글러, 토마스 헌즈, 유일한 8체급 석권 매니 파퀴아오, 무패의 전략가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 등의 선수들도 역사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긴 선수들입니다.


4. 첫 번째 조지
조지 포먼은 앞서 언급한 선수들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어쩌면 더 대단하다고도 평가할 수 있는 선수입니다. 어린 시절 가난한 가정 형편과 불량한 주변 환경 속에서도 권투 선수의 꿈을 키운 그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게 됩니다. 정확한 타격으로 고득점과 판정승을 노리는 대부분의 아마추어 선수들과 달리 강력한 주먹으로 상대를 때려 눕히던 그는 1969년 프로 선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데뷔 이후 무패를 유지함과 동시에 대부분의 경기를 KO승으로 끝내며 화끈한 경기력을 자랑하던 포먼은 1973년 세계 챔피언에 도전합니다. 당시 챔피언은 알리에게 생애 첫 패배를 안겨준 무패의 강자 조 프레이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프레이저의 승리를 예상하는 가운데 자메이카에서 ‘Sunshine Showdown’이라는 부제와 함께 두 사람의 승부가 치러집니다. 포먼은 무려 6번의 다운을 빼앗아 프레이저에게 첫 패배를 안겨주고 챔피언 벨트를 차지합니다.
챔피언을 차지한 후 40전 무패를 달성하며 그야말로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던 포먼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는 알리였습니다. 전성기가 지난 알리가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1라운드부터 특유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포먼을 밀어붙인 알리는 로프를 이용해 포먼의 주먹을 무력화하는 ‘Rope-a-dope’ 전술을 선보입니다. 결국 체력이 소진된 포먼은 복싱 역사상 최고의 경기 중 하나로 꼽히는 ‘The Rumble in the Jungle’에서 생애 첫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5. 두 번째 조지
알리에게 패배한 이후 동기 부여에 실패한 포먼은 신예 선수에게 허무하게 판정패를 당하기까지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가 끝난 후 탈의실에서 심장마비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 포먼은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 목사가 되어 종교 활동에 투신합니다.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가며 전도와 봉사에 힘을 쏟던 그는 더 많은 활동 자금을 벌기 위해서 1987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38세의 일이었으며 은퇴한 지 1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전성기 시절 차갑고 과묵한 성격이었던 포먼은 그 실력에 비해 인기는 떨어졌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전도사 생활을 거치며 밝고 활발한 성격으로 바뀐 그는 팬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갑니다. 포먼은 자신보다 훨씬 어린 선수들을 상대로 알리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노련한 경기 운영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포먼의 복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비웃던 이들도 그의 선전에 응원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내친 김에 챔피언 도전에 나선 포먼은 타이슨에게 귀를 물어뜯긴 에반더 홀리필드에게 아쉽게 패배하고 맙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선수 생활을 유지한 그는 45세의 나이에 다시 한번 챔피언 도전에 나섭니다. 상대는 홀리필드를 꺾고 무패행진을 달리던 마이클 무어러였습니다. 20년전 알리에게 패배했을 때 입었던 경기복을 입고 나타난 포먼은 공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반격에 성공해 KO승을 거두고 다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섭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48세까지 선수생활을 유지한 후 명예롭게 은퇴한 포먼은 자신의 이름을 딴 양면 그릴 브랜드를 성공시키는 등 승승장구를 이어 나갑니다. 늦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투사라는 이미지를 얻은 것이 성공의 주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권투 선수 중 최고의 갑부인 메이웨더 다음으로 많은 재산을 쌓는 데 성공한 그는 방송, 강연 등으로 여전히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P.S.
늦은 업로드 죄송합니다. 재밌게 읽었다고 응원해 주시는 학우분들께 보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글솜씨가 모자라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네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글 내용 역시 정형화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더욱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글부터는 고려대 특집편을 진행하려 합니다. 기대해 주세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01 13:0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