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200km, 삼천리를 걷고 오겠다며 호기롭게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걷다보니 삼천리를 모두 걷기 전에 언젠가는 길 위에서 멈추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날은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묵시아로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다. 허벅지 안쪽이 허전하다 싶어 더듬어보니 어느새 바지가 해져 찢어져 있었다. 길을 시작할 때 프랑스에서 면으로 된 등산바지 두 벌을 샀다. 빨래하며 번갈아 입다보니 그 중 하나는 산티아고에 도착한 날 찢어졌고, 그로부터 70km를 더 걸은 오늘 드디어 나머지 한 벌도 찢어졌다. 순간 여기까지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소지품 점검을 쭉 해보았다. 닳은 것은 바지뿐이 아니었다. 알루미늄으로 된 스틱의 끝은 반이 닳아 없어졌다. 한국에서 샀을 때는 딱딱하고 울퉁불퉁하던 신발 바닥도 이제는 매끈하게 닳았고 등산화 끈은 끊어질 듯 말 듯 하다. 두툼한 등산 양말은 발바닥 부분만 얇아졌다. 먼 길을 걸어온 흔적이 나도 모르는 새에 군데군데 남았다.

이제는 헐렁해져서 조금만 걸어도 내려가버리는 트레이닝 바지를 부여잡으며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버스를 타고 묵시아까지 향하자니 뭔가 아쉽다. 카페에 앉아 아침을 먹으며 고민에 빠졌다.

오늘 걷는다면 아름다운 길로 기억에 남을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담아두려고 아무리 용을 써봐도 어제 피스테라 곶의 밤하늘처럼 담지 못할 길이라면 차라리 언젠가 다시 와서 걸을 길을 남겨두기로 했다. 이렇게 나의 까미노는 막을 내렸다.

버스를 타고 지난 4일간 걸은 길을 따라 산티아고로 돌아갔다. 구불구불한 길 때문인지 느껴본 지 너무나 오래된 속도감 때문인지 현기증이 났다. 걸을 때는 지나가는 표지판에 어떤 낙서가 있는지, 길에 어떤 나무가 심어져있는지, 유모차 속의 아기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버스 안에서 보이는 것이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속 전철 안 인물들마냥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는 승객들과 감상할 시간도 없이 빠르게 스치는 풍경들이다. 그간 느린 것에 익숙해졌다면 순례가 끝난 지금은 빠른 것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빠름에 익숙해지더라도 느릴 때 보이는 것들이 있음을 잊지 않고 싶다.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는 스페인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공부를 해가다보니 이제는 대략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는 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무지의 상태안에 있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다. 이처럼 느릴 때 보이는 것들은 분명 언제나 그 자리에는 존재하지만, 알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멀미가 나서 눈을 감으니 지난 여정이 꿈 대신 찾아온다. 죽도록 힘들었던 첫 날 론세스바예스, 마을에 들어설 때 불타오르던 하늘을 배경으로 들리던 성당 종소리, 열정이 넘치던 팜플로나의 밤거리에서부터 갈리시아의 동산들과 낙엽길, 대서양으로 지던 어제의 석양, 깜깜한 도로에서 별빛과 달빛에 취해 홀린듯 걸었던 기억까지. 대서양의 노을과 밤하늘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묵시아로 걸어갈까 잠깐 생각이 스쳤지만 인생에 단 한 번이기에 미친듯 아름다울 수 있는 장면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흔한 로맨스 영화의 해피엔딩을 싫어했다. 그 장면 뒤에는 따분하고 짜증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활이 기다린다. 모두가 그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빛나는 한 순간만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것은 기만이다. 비유하자면 삶에 지쳐버린 자들이 맞는 마약 같은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길을 걸으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흔한 로맨스 영화 같은 길이었다. 힘든 하루 끝에는 등 뒤로 펼쳐지는 장관이, 타오르는 노을이, 안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제일 힘든 고생마저도 가치있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내 순례의 끝, 마지막 감상이 이렇게 상투적인 것일줄 누가 알았을까. 말 잘 듣는 아들이었고 학생이었음에도 반골 기질이 있었던 나는 적어도 원효대사와 같은 깨달음을 얻고 싶었다. 그랬다면 원효와 함께 길을 걷고 해골물 사건을 겪었지만 끝까지 당나라로 간 의상처럼 계속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땡중 원효처럼 중간에 때려치고 한국으로 가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길을 걸으며 늘 되뇌었다.

내 생각이 짧은 탓인지, 해골물을 원샷하지 않아서였는지 모르겠지만 한 순간 깨닫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나는 세상의 끝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뻔한 불경을 얻은 의상처럼 뻔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 길의 결론은 아주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고작 이걸 위해서 이 길을 걸었나 하는 후회는 들지 않는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진리는 무시할 수 있을만큼 당연하지만 모든 사칙연산의 뿌리가 된다.

누군가가 내게 산티아고 길에서 무엇을 얻었냐 말하면 나는 흔한 깨달음을 얻었다 대답할 것이다. 여느 자기계발서에서나 말해줄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침묵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그의 진정한 발화 의도가 내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지금 길을 마친 이 순간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깨달음을 널리 알려 성인이 된 이들과는 달리 내가 성인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깨닫기 위해 까미노에 오를 필요는 없다. 석가의 깨달음은 흔히 볼 수 있던 궁궐 옆 걸인에서 비롯되었다. 충분히 좋은 눈만 있다면 이 세상에는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 이 글을 읽고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궁금해서 까미노에 오를 필요는 더더욱 없다. 나는 나의 까미노를 걸었다. 두 명의 사람이 같은 길을 걷는다 해도 사실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분명 실망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더욱 크게 느낄 것이고 어떤 이들은 감동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까미노를 걷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 이유 이상의 것을 보고 듣고 느낄 것이다.

까미노를 이만 끝내기로 다짐한 순간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이제 뭐하지?'였다. 순식간에 할 일이 사라졌다. 사실 할 일은 많다. 비행기표를 끊었을 때의 계획대로 포르토를 가고, 파티마를 가고, 리스본을 가고, 그라나다, 지브롤터, 세비야, 바르셀로나, 마드리드를 가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저 생각을 했을 때 처음 머릿 속에 들어온 것은 막막한 감정도, 어서 빨리 계획을 수정해야겠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나는 멈추고 싶을때 멈출 수 있을만큼 자유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일 당장 뜻이 바뀌어 다시 어딘가를 향해 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산티아고에 한 일주일 묵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원래 계획대로 포르토, 파티마, 리스본 등지를 떠돌아다니겠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 손 안에 있다. 그리고 나는 아무 걱정도 문제도 없이 단순히 생각할 뿐이다.

멀미나는 세 시간의 주행을 마치고 산티아고에 다시 돌아왔다. 늦은 점심을 먹고,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미사를 참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역시나 와인 한 병을 사왔다. 평소처럼 알베르게 홀에 앉아 와인을 홀짝이며 글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이제 이 글도 내 순례처럼 막바지에 도달했다. 나는 다시 질문을 던지며 순례를 마무리짓는 이 글을 마친다. '이제 뭐하지?'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29 13:2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