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24)> 산티아고 순례길 30일차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것 같더니만 크리스마스는 떠들썩하게 보내고, 올해의 마지막 날은 떠들썩하게 보내나 했더니 의외로 혼자 보내게 되었다. 신년을 같이 보내기로 한 일행이 몇 마을 앞서있어 따라가려다 자갈을 밟았고, 덕분에 발목을 접질러 그대로 이 마을 포르투마린에 남게 되었다. 역시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다.

의도치 않게 이 마을에 묵게 되었지만 마을은 정말 예쁘다. 까미노에서는 보기 드문 큰 강이 마을 앞을 지나고 그 강을 바라보는 언덕에 마을이 있다. 마침 묵는 숙소에 오븐이 있길래 두꺼운 삼겹살을 사다 양념을 하고 와인에 졸이는 중이다. 적어도 올해의 마지막 저녁은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오븐을 예열하고 삼겹살을 넣었다. 예상 조리 시간은 두 시간 정도가 되겠다. 그 동안은 남은 화이트 와인을 홀짝여야지.

오븐 속에서 천천히 졸아 들어가는 와인과 그 속의 삼겹살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음식을 보며 생각하다보니 음식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올 한 해 이것저것 참 많이도 먹었다 생각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먹었다. 돌아다니는 일이 잦은 덕에 서울 곳곳의 맛집을 섭렵했다.

여러 욕심이 사그라지는 가운데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맛에 대한 욕심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조금 대도시다 싶으면 구글과 트립어드바이저를 총동원하여 맛집을 찾았다. 여러 와인을 마시며 평하기도 했다. 순례길에 있던 한 달 동안 소똥밭에 구르고 군대에서보다 훨씬 딱딱한 매트리스에서 자도 불만이 없었지만 식사에는 매우 예민했다.

순례길 위 지금껏 먹은 식사 중 언제나 내게 만족을 준 것은 고기였다. 스테이크. 너무 오래 익히면 질기다. 적당히 갈색으로 익은 표면을 썰어내면 덜 익은 핑크빛 속살이 보인다. 탐닉하기 좋은 상태다. 조그만 조각을 잘 씹어 넘기고 와인을 한 입 머금어 내리면 육즙의 감칠맛과 와인의 오묘함을 느낄 수 있다. 삼겹살구이. 스테이크와는 달리 노릇노릇 잘 익혀야만 한다. 그래야만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운 속살을 둘 다 즐길 수 있다. 느끼함은 맥주로 씻어낸다. 쇠고기가 되었든 삼겹살이 되었든 간에 고기에서 중요한 것은 익힘이다. 지금 철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을 만큼 배고프지만 오븐 앞에서 두 시간을 굳이 기다리는 이유도 역시 고기를 잘 익히기 위해서이다.

이곳에 와서 와인에 대한 식도락이 생겼다. 대충의 지역 색과 몇몇의 포도품종을 머리로 외우기만 하다가 이제는 나름 어떤 품종으로 어느 지방에서 만든 포도주는 이런 맛에 나겠구나 상상하며 와인을 고르기도 한다. 사실 소믈리에들이 즐겨 쓰는 육두구향이며 스파이시며 하는 것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것처럼 와인을 한 모금 마셨을 때 저 푸른 초원 위 그림 같은 집이 펼쳐지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저 이 와인을 사면 맛있겠다 정도만 느낀다. 그런데 가끔 상상을 깨는 맛이 나오기도 한다. 분명히 덜 떫고 향긋할 것이라 생각하고 샀는데 너무 떫고 시어서 마시기 어려운 와인들이 있다. 와인을 잘 아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아직 마실 때가 아니라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 와인 역시 고기처럼 익힘이 중요하다. 친구 말로는 아무리 품종이 좋고 생산자가 좋아도 적당히 익지 않으면 맛이 없다 한다.

사람 역시 나이가 들어갈수록 익어간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때에 맞게 익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질 좋은 쇠고기처럼 덜 익어도, 아니면 육회처럼 그 자체로도 참맛이 나는 이가 있지만 대다수는 뭉근히 오래 익어야 비로소 참맛이 난다. 덜 익은 삼겹살이 못 먹을 음식인 것은 삼겹살의 잘못이 아니다. 마실 시기가 덜 된 와인이 떫은 것 역시 와인의 잘못이 아니다. 때를 못 만난 탓이다.

보통 당신과 나의 차이는 쇠고기와 돼지고기보다도, 보르도 와인과 리오하 와인보다도 훨씬 크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어느 시점까지는 모두 정도에 맞게 익기를 요구한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분명 훌륭한 요리 재료와 와인일진대 언더쿡으로 재료를 망치거나 떫은맛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다만 주의할 점은 이것이다. 혹자는 자신이 와인 같은 사람이며, 익을수록 맛이 난다 착각하고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오버쿡 된 쇠고기의 끝은 고무 타이어 같은 식감이며 때를 놓친 와인의 끝은 포도 식초일 뿐이다. 때를 맞추어 자기 자신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

삼겹살이 제 때를 맞이하기 까지는 20분가량 남았다. 오븐 안에서 보글보글 끓는 화이트 와인과 그 안에서 졸아 드는 삼겹살을 바라보며 나의 때는 언제일까, 아니면 이미 지나버린 것인가 생각을 해본다. 요리와 와인은 수많은 선험자의 경험을 따른다면 쉽사리 정도(正道)를 알 수 있건만 사람이 백이면 백 개의 인생이 있으므로 인생에는 선험자도, 정도도 없다. 사람은 자신의 때를 알기 어렵다.

갑자기 난제에 부딪혔다. 나는 나의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이미 식초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곰곰이 나의 인생을 반추해보는 동안 나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하지만 이내 주방 속에 가득 찬 잘 익은 삼겹살과 와인의 향기는 우울해진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오븐의 땡 하는 알람이 울리자마자 나는 즐거이 오븐을 열고 트레이를 꺼냈다. 트레이 속에는 삼겹살이 영롱하게 빛난다. 그래, 제 때를 맞은 오븐 속 요리는 누군가가 열어주지 않는다면 결국 차갑게 식어갈 것이다. 동시에 오늘 나처럼 오븐 앞에서 요리가 익기를 기다리는 배고픈 누군가도 있겠지. 내가 오븐 속 요리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맛있게 익어가며 향기를 풍기는 것일 뿐이다.

수동적인 삶의 자세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인간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시험과 면접을 준비한다 해도 사회에서 나의 점수를 인정해주어야만 합격할 것이고 사업을 한다 해도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

오븐 속에서 잘 익은 삼겹살의 껍질은 바삭하고 살코기와 지방은 야들했다. 그리고 삼겹살의 육즙을 포함한 와인과 홀그레인 머스타드를 함께 끓여 만든 소스는 오묘했다. 이와 함께 1시간 동안 열어둔 리오하 와인을 곁들이니 한 해를 마무리하는 환상적인 식사가 되었다.

2018년 한 해 간 잘 익어왔다. 마지막 한 달은 온전히 이 길 위에서 익었다. 2019년 한 해도 잘 익어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오늘 오븐 속 삽겹살처럼 향기를 뿜어낼 수 있길 기원한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6 03:1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