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커플은 모든 역경을 헤치고 사랑을 쟁취한다. 사랑을 쟁취한 커플은 열정 넘치게 키스를 하고, 커플의 뒤로는 석양이 진다. 흔한 영화의 클리셰적인 해피 엔딩 씬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장면이기도 하다. 주인공 커플이 그 모든 고난을 함께 이겨내고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해도 그것은 오직 그 장면의 엔딩일 뿐 인생의 엔딩이 아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식의 엔딩은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나 먹힐만한 클리셰일 뿐 사실 그 커플이 앞으로 맞이할 시련은 더욱 많을 것이다. 집 구하기, 결혼식 스드메, 육아, 집안일 분배, 이직, 노후 대비 등등. 다만 인생의 제일 아름다운 부분 하나를 똑 떼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에 사람들은 마치 그 장면이 인생의 마지막인 것인 양 열광한다. 아마 그들 인생에도 그런 장면이 하나쯤은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오늘 아침 날씨는 흐림. 비가 오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하며 알베르게를 나섰다. 한국처럼 이 곳의 일기예보는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믿을만 하다. 오늘은 20km를 걷는다. 언제부터 20km가 부담없는 거리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거리라 생각해 쉬어가며 걸었다. 오늘의 길은 도로를 따라 위치한 작은 마을을 여럿 거치는 길이다. 잘 정돈된 길이지만 재미는 없다. 특히 오늘처럼 흐린 날에 그렇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들과 마을을 지나면 곧바로 보이는 다음 마을의 흐릿한 실루엣과 이제는 흔한 풍경이 되어버린 광활한 대지뿐이다.

어제는 힘들었지만 풍경 보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하고 도로를 걸으며 생각했다. 순간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한국에서의 삶에서 고작 몇 천 킬로미터 벗어났다고 매일의 영광을 기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매일 똑같은 루트를 밟고, 똑같은 밥을 먹으며, 똑같은 일상 속에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족은 없었다.

지금 걷는 지방은 팔렌시아 지방이다. 2학년 때 수업을 같이 듣게 되어 지금까지 연락하는 헥터의 고향이다. 헥터는 내가 팔렌시아 지방의 인상을 묘사하니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일상 속에 있던 풍경이라 했다. 나는 감탄해 마지않던 파리 풍경을 보고 티피컬하다 표현한 파리의 택시 운전사를 아직 잊지 않았다. 처음엔 감탄하며 걸었던 이 풍경을 걸은 지 아직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는 이 풍경을 어느 새 지겹다 생각했다. 마치 파리의 택시 운전사가 된 기분이다.

매일이 장관일 필요는 없다. 처음에는 감탄했던 이 드넓은 평야도 일주일이면 질리기 마련이다. 푸아그라를 끝내주게 잘 다루던 부르고스의 어느 바에서 푸아그라 메뉴를 여러 개 시켰다. 푸아그라를 송아지 안심과 함께 매칭한 것, 푸아그라를 통째로 구워 망고잼이 발린 구운 빵과 내놓은 것, 푸아그라와 새우. 모든 조합이 완벽했지만 세 번째 접시를 먹으니 질려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다. 늘 좋은 것을 입고 먹고 보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사막 위 오아시스처럼 값지지는 않을 것이다.

겨울 까미노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안개 속에서 진흙탕을 걷고, 걸음이 휘청일 정도의 맞바람과 맞서고, 방수 재킷따위는 뚫어버리는 비를 맞고, 비와 바람으로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남산보다 조금 작은 언덕을 오르는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산 위를 올라가서 뒤를 보면 갈 길은 멀지만 그 순간만큼은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하루 중 단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을 위해 이 먼 길을 걷는가 싶다. 마치 해피엔딩 몇 분을 위해 한 두 시간을 긴장감 넘치게 끌어가는 영화처럼 말이다.

소확행이라는 신조어가 요즘 핫한 키워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의미이다. 까미노 위에서의 행복은 소소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번에 오르막이 있으면 다음번에는 내리막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최고봉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일 등의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행복은 흔하지 않다. 하지만 걷다보면 예측할 수 없었던 행복이 급습하는 곳이 바로 이 곳, 겨울 까미노이다. 진흙탕을 걸을 때는 어느 순간부턴가 단단해진 땅이 행복이다. 안개 속을 걸을 때는 이 세상에서 오롯이 홀로 된 기분을 느낀다. 비를 맞으며 걷다가 비가 갑자기 그쳐 하늘을 바라보면 파란 하늘이 어디선가 얼굴을 내민다. 까미노 위의 행복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무뚝뚝히 길을 걷다 갑자기 드는 행복감은 소소하진 않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행복 그대로의 행복이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길가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 가까이 와서 애교 넘치게 얼굴을 비벼댄다. 근처에 있던 다른 고양이들도 와서 나를 둘러싼다. 심장이 두근댄다. 30분을 놀아주다 나왔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바에서 초리조 또띠야와 맥주 한 잔으로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지친 발걸음을 달래주는 오늘의 첫 끼이다. 초리조 또띠야는 기대를 안 했는데 무척 맛있었다. 점심을 먹고 바에서 나왔다. 마침 앞으로 지나가던 한국인 형님을 만났다. 오늘 묵을 알베르게에서 조리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가능하단다.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삼겹살을 구워 먹어야지. 오늘도 이렇게 행복은 나를 급습했다.

내일도 모레도 심지어는 글피에도 평야는 끝나지 않는다. 늘 같은 풍경 같은 하늘이겠지만 투덜대지 않으련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하이라이트는 아니고 매일매일이 행복일 필요는 없기에. 그리고 행복은 언제나 우리를 놀래키는 것을 좋아하기에.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01 13:5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