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온 후 많이 소홀해졌지만 모태신앙으로부터 내려온 가톨릭 신자의 DNA가 나에게 있다. 어쩌면 내 몇몇 주변인들은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나의 모습은 금주보다는 음주, 신자보다는 미친 자, 성서보다는 전공서가 어울리는 사람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가톨릭 신자고 종교 문제는 퍽 민감한 문제기 때문에 지금껏 그 어디에서도 종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는 예민한 문제다. 비종교인들에게 종교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영역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종교인들에게 비종교인들은 마치 진리를 모르는 불쌍한 어린양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종교인으로서의 자아와 사회인으로의 자아 두 가지가 내 안에 공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단순명료한 진실을 믿는다. 동시에 성당에 가면 천지의 창조주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기도를 하고,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담과 이브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닌 이상에야 꽤나 모순적이지만 나에게 세상의 상식은 상식이며 종교는 종교다. 만일 양쪽 중 한 쪽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종교인임을 포기해야 하거나 세상의 과학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 있어 단순한 여행이 아닌 순례이다. 세계 3대 성모 성지 중 하나라는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순례를 시작했고 순례의 마지막은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끝맺는다. 따라서 이번 순례는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지만 맹목적으로 성당에 다녔던 학창시절과는 달리 스스로 내 안에 잠든 씨앗을 확인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루르드에서는 씨앗이 싹 터오는 듯 했다. 그러나 화려한 유럽의 성당들을 볼 때면 그 웅장함에 놀라면서도 왠지 가톨릭 신자로서 가슴 한 편이 불편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유럽의 성당들은 화려하다. 넓은 성전 안 오직 제대와 감실 속 붉은 불빛이 비추는 한국의 대다수 성당과는 달리 유럽 성당의 내부는 금빛이다. 정사각형 방과 올려다보면 목이 아픈 고딕 성당의 돔은 많은 조각과 그림으로 꾸며져 있다. 물론 프랑스와 스페인의 오랜 가톨릭 역사와 이에 대한 아낌없는 왕가와 귀족들의 지원 덕분이겠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번쩍이는 절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비슷한 시대 농민들의 생활상을 다룬 글이나 고증이 잘 된 영화 등을 본다면 참혹하기 그지없다. 거리에 몰려다니는 쥐 떼와 그로 인한 페스트, 그게 아니라도 열악한 위생상태, 가뭄이 오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농민들. 그러는 와중에도 굶어 죽어가는 농민들의 헌금과 무려 5세기 동안이나 지속된 면죄부 판매, 왕가의 지원으로 인해 종교의 성직자들과 성전은 나날이 화려해져 갔을 것이다.

종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현세에서의 교화로 인한 내세에서의 구원을 많은 종교들이 내세운다. 혹 어떤 종교들의 경우 아마게돈이 멀지 않았음을 선포하며 그로부터의 구원을 미끼로 신도들을 모으기도 한다. 하지만 화려한 성당 안 금색 장식들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중세의 가톨릭이 종교의 참 목적을 실천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계급이 명확히 나뉜 사회였기에 태어난 대로 일생을 살아간다는 인식이 있었겠지만 날 때부터 호의호식하는 왕과 귀족들을 보며 날 때부터 늘 굶주리던 농민들이 가지는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왕과 귀족, 성직자들의 아름다운 대성전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는 식량이었을 텐데.

불교는 이에 대해 윤회라는 명확한 교리를 제시한다. 내가 현세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나의 전생 때문이며 현세에서 쌓은 나의 과오나 덕에 따라 나는 미래에 재벌 총수의 아들이 될 수도, 땅 속의 지렁이가 될 수도 있다. 현세를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교화하는 데에는 가톨릭의 교리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더 설득력 있다. 둘 다 미래를 위해 참는 아이가 성공한다는 마시멜로 이야기 한 편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인간 세계의 부귀영화 혹은 고통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 한 내세의 부귀영화 혹은 고통보다 훨씬 더 와 닿는다. 죽은 후의 상태를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상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웅장하고 빛나는 유럽의 성당들과 면죄부 판매 등의 불편한 역사 뒤에 감춰져있을 유럽 평민들의 힘든 삶을 생각하면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이 이해가 된다. 호의호식하며 많은 후원으로 유럽의 많은 성당을 쌓아올린 이들의 삶보다 금욕주의를 표방하는 청교도적 삶이 천국에 제일 가까워 보이니 말이다. 현재의 가톨릭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시절 유럽의 가톨릭은 적어도 모든 이들과 함께하는 가톨릭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래되고 큰 성당은 시설 보수에 끊임없이 투자를 해주어야 하고 그 비용을 충당하려는 목적 때문인지 스페인 성당에서는 입장료를 받는다. 적게는 2유로부터 많게는 5유로까지. 그래서인지 입장하는 방문객들은 성당을 하나의 박물관이나 미술 전시관 정도로 여긴다. 물론 성당에도 성전의 필수 요소인 감실이나 성수반 등은 없다. 대신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포즈를 취하는 관광객들이 가득하다.

한국에서 굳이 미사 시간이 아니라도 성당을 찾곤 했다. 꼭 기도를 하지 않더라도 가만히 감실 앞에 앉아있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곤 했다. 물론 유럽의 여러 성당들에서 역시 그러한 평화를 느꼈다. 그러나 노틀담이나 이번 부르고스 대성당과 같이 소위 이름 난 대성당들은 달랐다. 이런 곳들은 성당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 혹은 미술 전시관이다. 작은 성당에서 느낄 수 있는 경건함, 신성함과 평화로움은 없다. 상당히 아쉬운 점이었다.

대충 설명을 들으며 돌아봐도 1시간 반이 걸리는 성당 같이 생긴 큰 박물관을 떠났다. 구글 지도를 켜고 작지만 마음이 편안해질만한 성당을 찾는다. 순례자에게는 대성당의 웅장함보다는 소성전의 소박함이 맞는다. 오늘 저녁은 그 곳에서 미사를 참례해야겠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24 00: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