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고 말하는 그녀의 눈가는 촉촉해져 있었다. 고마웠지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는 그녀의 선언은 담담해지려 노력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녀는 상당한 시간 동안 우리의 이별에 대해 고민해 왔을 것이며, 나도 어느정도 짐작은 했다. 그 말에 대해 나는 그저 알겠다는 말 이외의 반응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갔다. 우리는 왕십리 역사 앞 공원에서 헤어졌다. 우리 둘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공원을 떠났다. 우리 둘은 모두 뒤를 돌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가 처음 사랑을 말했을 때, 우리는 섹스를 마치고 다정히 안고 누워있었다. 나는 내 몸이 갑자기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직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감정을 느끼기 전이었다. 아니 사실 우리 관계를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있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맞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사랑이 사치라고 느끼던 때였다. 난 멈칫하다가, 나도 사랑해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 머뭇거림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나를 그녀의 품에 깊게 안아줬고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은 조금 늦게 시작했다. 그녀가 사랑을 말한 후, 내가 사랑을 말한 후 보다 몇 달 후의 일이다. 그 와중에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곧잘 하곤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좁은 2층 침대에 그녀와 누워있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을 전했다. 그녀는 내 품에 더욱 깊숙히 파고들었다. 왜인지 내가 눈물이 났다. 아마 그녀는 나의 사랑한다는 말에서 첫 진심을 느꼈을 것 같다. 미안했다. 후회스러웠다. 사랑하는 그녀를 마음 아프게 하고 있었다. 새벽 4시가 넘어가는 때, 나는 집에 돌아가려고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녀는 자고 있었으며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택시를 부르고 신발 끈을 묶는 도중 그녀가 깼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로 가서 볼에 입을 맞추고, 한번 더 내 사랑을 속삭였다.

  그녀가 밉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녀에 대한 사랑은 많이 가신 상태였다. 사실 이별의 말을 들은 후에 내 심경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였다. 결국 일은 일어났고 나는 그녀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담배가 피고 싶었다. 금연인 공원에서 조금 걸어 나와 담배를 피며, 처음으로 뒤를 돌아본다. 그녀는 한참 전에 그 길을 지나 집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뒤를 돌아본다. 몸을 완전히 돌리진 않은 채, 그녀가 지나 돌아간 길을 응시한다. 그녀가 보인다. 축 처진 어깨에 느린 걸음걸이가 보인다. 눈물을 참으며 의연해지려는 그녀의 표정이 보인다.

  그녀는 뒤를 돌아 봤을까? 돌아 봤다면, 내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모습에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우리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시간이 많이 지났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으며, 그녀도 잘지내는 것으로 알고있다. 나는 두세번 정도 술에 취해 그녀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지만 그 통화가 성사된 적은 없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녀를 떠올린다. 나는 그냥 그녀와 같이 갔던 왕십리의 맛있는 꼼장어 집이 생각낫던 것이다. 피 투성이의 꼼장어 내장을 보며 질겁을 하던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약간은 기분이 멜랑콜리 해진다. 나는 집 근처인 홍대엔 꼼장어 집이 없나 검색을 해본다.

  홍대에 있는 '꼼장어 맛집'에 나는 지금의 여자친구와 갔다.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셨다. 그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2차를
가자는 여자친구의 말에는 거절과 속이 별로라는 거짓말을 한다. 약간은 삐진 여자친구를 보내고 나는 왕십리로 향한다. 높은 역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공원을 본다. 스무살 중반은 되었을까, 두 남녀가 보인다. 둘은 서로 많이 떨어져 있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 중이다. 그렇게 떨어져 있음에도, 나는 그들을 한 장면으로 볼 수 있다. 갑자기 그 둘은 뒤를 돌아보고, 서로를 응시한다. 그들은 발길을 돌려 서로에게로 향한다. 둘은 서로에게 쓰러지듯 안긴다. 나는 '미안해.'라고 나지막히 말한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5 18:5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