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밤이 있다. 그런 날은 보통 다음날 커피를 마시면서 “굳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었어야만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밤이란 워낙 길어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기가 십상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서로가 좋아지는 것은 너무나 쉽다. 하지만 나 같이 ‘아무’를 전제한 사람에게 상대방은 그냥 밤이 깊어가도, 아침이 와도 그냥 ‘아무’이다. 사실 어스름한 시간엔 사람 사이에 선이라는 것이 그다지 존재하지 않아 그냥 이 깊어가다 보면, 결국 다다르는 것이고 해가 밝아온다. 하지만 밝은 시간엔 관계가 조금 복잡해진다. 이 때는 선이라는 것이 생겨 누군가 누군가의 선을 침범하기도 아니면 서로가 서로의 선을 침범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나로서는 선을 침범 당하는 것이 싫다. 그럴 때면 나는 선을 다시 한 번 긋는 수밖에 없고, 그 때의 양 쪽이 느끼는 감정이 싫다. 그래서 ‘아무’를 만난 나는 상대방도 내가 ‘아무’이기를 바라지만 인생이 그렇듯이 매번 그렇게 잘 풀릴 수는 없다.

나는 참 신기한게, 여자들은 꼭 정리정돈을 하고 갔더랬다. 내 핸드폰을 잠금 해제 하려했던 그녀도, 잠결에도 떠나는 것을 눈치 못했던 몇 몇들도 다 나의 옷가지를 정돈하고 갔다. 그녀들도 둘로 나뉘는 것은 마찬가지다. 선을 넘거나 넘지 않거나. 그래서 이상하다. 그냥 하룻밤을 보낸 남자로 밖에 생각을 안하면서 구지 왜 귀찮은 일을 사서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역시 습관이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아무와 있었던 아무도 없는 방에 찌뿌둥하게 깨어나며 처음 눈에 띄는 것이 옷걸이에 걸려있는 벗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코트라니 좀 소름 돋지 않는가. 그런 느낌을 갖고 하루를 시작하면 뭔가 한층 더 경건해지는 느낌이다. 먼저 갔던 여자들 이야기를 했는데 그 기억들을 반추해보면 나는 참 못됐던 것 같다. 대부분 나를 깨우며 “같이 나가자.” 하는데 나는 매번 잠이 많다며 “먼저 가.”라고 말한다. 스산한 새벽에 혼자 방을 나서는 여자의 마음을 가늠하긴 힘들다. 어떤 사람은 그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집으로, 아니면 속으로 내 욕을 하며 집으로, 아니면 내가 찍어준 핸드폰 번호로 “먼저 갈게요. 잘자.” 하며 왠지 모를 부푼 마음을 가지고 어디론가 향할지도. 그런데, 어떻게 나가던지 간에 쓸쓸해 보이는 그림일 것 같다. 지금이 겨울이다 보니 추위에 떨며 혼자 종종 걸음을 치는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미안해 씁쓸하다.

어제는 나에게는 그런, 아무에게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밤이었다. 우연히라고 말하기도 진부할 정도로 우린 어쩌다 만났고, 이미 취한 그녀는 나에게 최적의 ‘아무’였다. 나는 사랑을 말하였고 그녀는 내가 재밌다고 했다. 물론 사랑하지는 않지만, 거짓을 속삭였다고 말하긴 싫다. 적어도 내가 내뱉은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을 말하는 것은 많이 다르지 않나. 그래서 나는 음악이나 영화에서 첫 만남에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런 장면들에 있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아니, 내가 그러고 있으니 당연한건가. 어쨌든 그녀는 취하고 피곤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름다웠고, 나는 혼자 자기가 싫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녀의 집으로 갔다.

내 최고의 매력은 역시 '쉽다'이지 않나 싶다. 난 쉽게 여자를 안는다. 쉽게 유혹에 넘어간다. 쉽게 사랑에 빠진다. 만약 누가 나의 손을 잡아 끌면 나는 무 뽑히듯 끌려나온다. 다들 말했다. 구석에 혼자 앉아있는 나는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고. 그래서 말을 걸었다고. 맞는 말이다. 나는 쓸쓸하다. 쓸쓸이란 단어는 외로움이란 단어와도 밀접한 영향이 있으니 나는 외롭기도하다. 그리고 모두가 다 알 듯이 외로운 사람은 쉽다. 여자들은 그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것 같다. 나에게 접촉할 때 나를 쉬이 나를 눕힐 수 있다는 생각은 아닐지 몰라도 결국 결과는 같다. 외로운 나를 보는 여자들은 취해서 나에게 온다. 그리고 대체로 자신을 드러낸다. 누구나 심패시는 있으니까. 그녀들이 던지는 농담 속에서도 나에 대한 동정이, 쉬이 보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여자의 유혹은 웬만하면 거절해서 나쁠 것이 없으니, 그건 좋다. 그런데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 내 20대가 끝나가는 지금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어찌 보면 연습을 하고 있나보다. 처음 본 사람의 눈이 너무 이뻐도, 긴 손가락이 이쁜 손이 너무 이뻐도, 나를 현혹시키는 아름다운 말들을 이겨내고자 했다. 지금의 내가 밤을 떼우는 방식이 의도치 않게 사랑이라는 감정의 상자를 꽁꽁 가두는 것 같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의 성질이 애초에 상자 속에 가둘 수 없지 않는가. 가만히 있어도 상자를 적시고 상자를 흔들기까지 하면 사랑은 결국 새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새는 물을 막으려 노력했고 상자가 젖으면 더 큰 상자를 가져와 담아 놓기 때문에 드라마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드라마가 싫다.

외로우면 누군가를 제대로 만나면 되지 않을까. 왜 그러지 않을까. 이 질문의 답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상처 때문이다. 너무나 진부한 스토리 라인이다. 어쨌든 나도 그 수 많은 사람들이 입고 입히는 상처를 안고 한 구석에 앉아 술을 홀짝이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하지만 내가 찾는 것은 큐어가 아니다. 잘 쳐줘야 타이레놀 정도랄까. 옛날에는 효력도 짧았다. 이런 진통제를 맞기 시작할 때 쯤 나는 아침만 되면 후회에 잠겼다. 왜 이래야하나, 허무감과 공허함. 하지만 그래도 찾아다녔다. 적어도 새벽까지는 효력이 있으니까. 이 시기엔 내가 아침을 상당히 싫어해서 마치 도망 다니 듯 잠을 많이 잤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젠 조금 다르다. 아침에 일어나도 허무하지 않다. 내 옆에 알몸으로 잠을 자는 사람이 추해보이지도, “또 이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쩌면 좋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론 너무 이런 휘발적인 일상이 걱정이 되기는 한다. 여기서 재밌는건, 초반 시기엔 내가 상대방에게 좀 더 다정했던 것 같다. 마치 그 날 밤만은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우린 안고 잤었고 애정 어린 말을 서로에게 건넸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등을 돌리고 자며 침대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는다. 더 건조해진 대신에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건조하니까 마음이 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인처럼 행동하다 다음 날 등 돌리는 것이 더 상처가 되기 쉽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왜 큐어를 찾지 않을까,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부작용을 걱정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강한 약에는 부작용이 따를 것이니 말이다. 금단 증상도 포함될 것이며. 내가 가진 상처는 아무래도 항암제 수준이 필요할 듯해서 더 그렇다. 나는 그냥 하루하루 넘기며 위험한 시도는 하지 않겠다. 나는 드라마가 싫기 때문에.

여자들은 으레, “집 너무 더러운데~” 말을 반복한다. 분명 더러운 곳도 있었지만 깨끗한데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도 나에겐 신기하다. 하나 같이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럼 난 그냥 밖에서 자자고 바로 말하는 편이다. 숙박비를 아끼니 좋지만, 반기지 않는 남의 공간에 가는 것이 그리 땡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새벽에는 말이다. 나는 부모님과 살아서 아쉽지만 우리 집으로 갈 수는 없다. 그래도 서울에 잘 곳은 천지이고 우린 말없이 모든 것을 합의 후 방으로 들어간다. 한 번 자기는 호텔에서 자고 싶다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이 조금 고깝게 들려 그다지 맘에 들진 않았지만 놓치긴 아까운 화려한 여자였고 가까운 호텔에 투숙했다. 그 여자는 먼저 씻는다며 화장실에 들어왔고 나는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 그날 나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들었다. 그 여자의 알몸은 잘빠졌지만 내게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그냥 고깃덩이 같은 느낌그냥 고깃덩이 같은 느낌. 여자가 호텔에 가자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이유가 없이 그렇게 느껴졌다. 내가 술이 깼어서 그런가? 난 원래 술에 취하진 않는데. 나는 그냥 편의점에 가야 한다고 나왔고 집에 왔다. 집에서 나는 왜 오늘은 이런 느낌이 들었는지, 약간 궁금함을 가지고 잠에 들었다.

어제 만난 그녀의 집은 깨끗했다. 아니 깨끗함을 넘어 너무나 잘 꾸며져 있었다. 조금 느낌이 이상하긴 했다. 방이 상당히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기 때문인데, 샤넬백을 매고 있는 그녀의 취향과 그로 인한 느낌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방이 거의 공주님 방 정도여서 조금 불편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샤워를 하고, 나는 그 다음에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그녀는 잠옷 차림이었다. 화려했던 그녀의 원피스가 나에게 상당히 매력을 줬던 것이 생각나 옷을 갈아입고 하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그녀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냥 오늘은 일을 벌일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말했다. 나는 생리를 하냐고 물어봤고, 그녀는 아니라 했다. 그냥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고. 호호호 웃으며 미안하다 하는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성적이어서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녀를 눕히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다음에 하자는 그녀의 말이 조금 언짢게 들리긴 했어서 나는 도대체 다음이란게 뭐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했다. 그녀는 또 웃더니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잘어울리지 않게 계속 호호 웃는 그녀가 조금은 이상하지만 나는 수긍했다. 수긍하며 집에 가고마 하고 옷을 챙겼다. 난 “그래도 샤워는 시켜줬네.” 하며 농담을 던졌다. 그러는 나를 보며 그녀는 자고 가고 싶으면 자고 가라 말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그냥 자고 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혼자 자기가 싫어서 이 사람을 안으려 온 것은 맞으니까. 안지는 못하더라도 같이 잘 수는 있고 그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같이 자기로 했다. 물론 나는 등을 돌리며 잠을 청했다.

사실 끝에 다다라서 거부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가다 있고, 나는 굳이 애원을 하지는 않는 타입이라 뭐 매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거부를 한 사람 중에 자고 가라는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에다가 성적으로 조금 흥분되어 있는 상태이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놀랍도록 빨리 잠들었다. 나는 티비를 키고 조용히 버튼을 누른 다음에 영화를 보려 했다. 그런데 IPTV는 공짜 영화에도 비밀번호를 쳐야 했고 굳이 깨워서 비밀번호를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아서 영화 보기를 포기하고 채널을 돌리다 그냥 자야지. 하고 누웠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담배를 피고 싶었는데, 여자 방에서 담배를 피긴 조금 그렇고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나가서 피려고 나가면 자연스레 문이 잠길 것이기 때문에 담배 피는 것도 포기했다. 나는 꼴초라 아예 그냥 담배를 피려고 집에 갈까 생각까지 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조금 차분해진 상태에서 나는 방을 한번 더 둘러봤다. 강남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는데 크기가 꽤 컸다. 침대 맞은편에 있는 티비도 꽤 컸는데 그 옆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어서 나는 잠깐 여기가 모텔인가 하고 착각이 들었다. 샤넬백과 고급스런 옷차림을 보아서 집에 돈이 많나보다 생각하며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새벽에 누가 내 몸을 자꾸 흔들어 잠이 깼다. 물론 당연히 그녀였고 조금 울먹이며 그녀는 나보고 일어나라 닦달했다. 나는 왜 그러냐며 조금 짜증을 냈는데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조금 고인 것을 보고선 잠이 달아났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악몽을 꿨다는 것이었다. 난 어이가 없어서 무시하고 다시 베개에 머릴 뉘었는데 자꾸 훌쩍이는 것이다. 신경이 쓰여 나는 조금 위로해주기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무슨 꿈을 꾸었냐고 물어봤다. 말하기 싫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어쩌라는 건지 또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나는 어쩌란 거냐고 물어봤고 그녀는 노래를 불러 달라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멍하니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꾸 노래를 불러 달라 말했다. 그것도 슬픈 노래를. 부를 노래로 카드 캡터 체리의 주제가를 조금 고려하고 있던 나로서는 딱히 떠오르는 노래가 없었다. 하긴 어차피 부를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남자가 슬픈, 우는 여자에게 약하듯이 결국 노래를 불러줬다.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마저 빼앗아 나를 상심하게 만들었지만”
“어느새 이제는 가슴 시린 그런 기억조차도 모두 깨끗하게 잊어버린 무뎌진 사람이 되가네”

대충 이런 가사의 노래였는데 나는 오묘한 기분에 2절까지 완창해 버렸다. 노래가 다 끝나자 여자는 갑자기 웃으며 박수를 치더랬다. 나도 노래를 부르며 내 감정에 빠져 버린 상태여서 웃는 것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그래서 그녀에게 이제 다시 자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어봤고, 나는 괴상한 심술이 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젠 아예 잘 마음이 없어진 그녀는 티비를 켰다. 노래까지 완창한 나도 잠이 달아나 티비를 쳐다봤다. 채널이 자꾸 돌아갔다. 그러다 요즘 인기 있는 한 예능 프로그램을 고정하고 보더니 소리를 키웠다. 나는 예능을 좋아하지 않아, 아니 싫어하는 편에 더 가까워 소리 좀 줄이라고 말하곤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려 누웠고, 조금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와 긴 잠을 잤다. 아무래도 그 여자 때문에 잠을 설쳤던 것이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자다 일어나니 해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뭐 다들 그렇듯이 나는 핸드폰을 켰다. 여러 가지 알림들.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잘들어갔어?” 모르는 번호다.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어제, 아니 오늘 새벽의 그녀인 것 같다.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냥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차단하려는 순간, 그 여자에게 온 문자가 조금 더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용은 “약은 먹었어?”, “답장이 없어 걱정되네.” “정말 죽었어?” 약과 죽었냔 얘기는 내가 농담 친 부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어서 깜짝 놀랐다. 아침에 나갈 때 왜 이렇게 일찍 가냐는 물음에 “나는 제 때 약을 안먹으면 죽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쯤 되니 그냥 답장은 해주자 하는 마음에 지금 일어났다 고 답장을 했다. 그 후 나는 너와 연락을 하기 싫다. 차단을 해야할 것 같다라고 타이핑도 하기 전에 그녀의 메시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젠 고마웠어.” “보고 싶어.” “오늘 시간 돼?”

문제는 결국 마지막 문자였어서 나는 한참 고민에 잠겼다. 한번 만난 사람이랑 다시 만나지 않는다가 내 신조지만 이 여자를 내가 만났다고 해야 하는지 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처음 있는 케이스였다. 전에 말했던 직전 거부했던 여성들과는 연락을 한 적이 없어서. 나랑 이 여자가 진짜 ‘만나’야 하는지 생각을 했다. 사실 머릿속에 그녀의 형상을 그려 보려 했지만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려보려 하는 이유는 역시 ‘다시 만날 만 한 가치가 있는지.’ 였고 기억이 안나는 나는 그녀의 번호를 ‘장필순’이라고 적어놓은 다음 카카오톡에 들어가 프로필을 살폈다. 프로필 사진이 그 사람의 얼굴이 아니어서 나는 히스토리를 뒤적여보다 결국 그녀의 외형이 담긴 사진을 발견했다. 가치가 있었다. 얼굴은 나오지 않은 몸의 사진이었는데, 매력적이었다. 그러면서 어제와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이야기들과 사건들을 종합해보고 나는 오늘 하루 같이 노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친구 몇몇은 나의 여성 편력과 휘발성 만남을 좋아하는 성향을 두고 “너는 마초다.” “정복욕이 있다.” 이렇게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한다. 물론 내 사생활을 그렇게까지 아는 친구는 많지 않아서 굳이 무서울 건 없다. 내가 믿는 친구들에게만 나의 이야기를 하니까 뭐 그 친구들도 나를 미워하거나 책망하기까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를 불쌍히 여긴다. 솔직히 나도 이렇게 사는 내 자신이 불쌍해 보이긴 하지만 내가 마초성이 짙다라는 말은 거부하고 싶다. 여자랑 이렇게 까지 만나려는 것도, 한 번 본 여자를 안보는 것이 솔직히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단 여자를 찾는건, 단순한 쾌락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물론 쾌락은 전해온다. 어여쁜 여자와 노는 것은 꽤 수준 높은 쾌락이겠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말로는 잘 설명을 못하겠지만 거대한 무언가가, 예를 들면 조물주가 나에게 매준 운명에 이렇게 이미 써있는 듯이 나는 왠지 모를 충동에 이끌려 사랑을 말했다. 그렇게 나는 운명을 써내려가다가 결국 중독에 까지 다다른 것 같다. 나는 성욕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 번 만난 사람과 안만난 다는 것. 이게 사람들에겐 정복욕으로 보이나 본데 나는 그냥 드라마를 피하기 위해서임이니, 오히려 소심하다고 보는게 맞지 않나 싶다.

해가 아직 완전히 저물지 않아 그다지 당장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해를 싫어한다. 뭔가 나를 노출시키는 느낌. 준엄한 햇빛에 의해 심판 받는 느낌. 그런데 이 여자는 지금 나와 같이 저녁을 먹자는 것이다. 우리 동네로 오겠다고. 아무리 나라도 내 동네에도 소속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내 구역에서 보긴 싫어서 이태원에 보기로 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택시를 탔다. 그 여자가 사는 강남과 내 지역인 목동과의 사이가 멀어 대충 이태원을 선정했는데 강변북로가 많이 막히자 나온 것을 조금 후회했다. 오늘은 누군가가 필요한 날도 그다지 아니었고 내가 움직이긴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한 때 나도 소위 맛집이라 불리는 데를 찾아다녔던 적이 있다. 물론 블로그에서 멍청한 이들이 괜히 이쁘게 사진 찍어서 홍보하는 느낌으로 하는 데 말고. 난 나름 미식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한창 내 전 여자친구와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혼자가 된 후로 나는 저녁과 점심을 밖에서 먹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냥 밤에 술 마시러 나갈 뿐이지, 어떤 식당을 가서 설레는 마음에 음식을 기다리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혼밥을 못하는 것은 아닌데, 그냥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는 것이 편했다. 결국 저녁을 먹는 다는 것은 데이트이잖나. 난 같이 술만 먹는 것은 데이트가 아닐 때도 많다 생각해서 누군가와 저녁을 먹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에 냉면을 같은 침대에서 일어난 사람과 먹을 때가 더 많았다. 그 때는 데이트라기보다, 정리 같은, 관계의 해장 같은 느낌이었다.

보통 남자가 음식점을 정하는 편이니 나도 어디를 갈지 고심했다. 한 브라질식 후라이드 치킨 집을 정하고 녹사평역에서 나는 그녀를 기다렸다. 나는 녹사평역을 무서워한다. 나 같이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무서워 할 것이다. 무서움을 참으며 나는 지상까지 올라갔고 아직 그녀가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자 지하철역 내부로 내려와 추위를 피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톡으로 물어보려다가 그래도 뭐 보면 알겠지, 라는 생각으로 기다리니 곧 에스컬레이터에서 그녀가 올라왔고 나는 알아챘다. 난 그녀의 나이도 모르고 웬만한 사람과는 존댓말을 쓰는 편이라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녀는 예의 그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만세 하듯이 나를 반겼고 나는 그 모습이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하며 식당으로 가자 말했다.

그녀는 나보다는 훨씬 수다쟁이였다. 가면서 이러쿵 저러쿵 의미 없는 말을 했다. 자기는 뭐 학교를 끝내고 조금 쉬고 있다느니, 오늘 가는 곳이 어딘지 맛있는지 분위기는 어떤지 물어보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나는 내 나이를 아냐고 물어봤고 그녀는 내 나이를 정확히 맞췄다. 내가 내 나이를 말한적이 있나? 라고 생각하며 그럼 당신은 몇 살이냐고 말했고 놀랍게도 그녀는 나보다 네 살이 어렸다! 나는 꽤 동안인 편이었고, 그녀는 나이에 비해 훨씬 성숙히 생기고 스타일도 고급스러워 나는 나보다 누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네 살이나 어리다니 나는 조금 무서워졌고 자리가 불편했다. 나는 어린 여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뭐 그녀의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니지만 내가 조금 더 어렸을 때 4살 차의 여자를 가끔 만나면 너무나 관념의 차이가 크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이런 생각에 잠기며 그냥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걸어갔고, 도착하자 내가 가려던 그 가게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가게로 바뀐 것이다.

좀 외진 곳에 있는 가게라, 다른 가게가 멀었고 딱히 움직이며 먹고 싶은 음식도 보이지 않아 내가 시간을 끌고 있을 무렵 그녀는 제안을 했다. 자기가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준다고. 나는 이런 급전개에 조금 황당해서 벙쪄있었고 그녀는 자꾸 자기가 요리를 잘한다며 나를 유혹했다. 생각해보니 뭐 이런 스피디한 진행이 오히려 좋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왔던 길에 와인샵이 하나 있어서 거기서 적당한 와인을 하나 샀다. 나로서는 약간의 예의 같은 것이었다. 분위기를 조금 잡아줄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잘 것이라고 미리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나 건조한 상태에서 이루어지긴 싫었다. 보통 나는 술에 취하진 않아도 여자들과 술을 먹다가 일이 벌어지니 나름의 무드를 잡아줬는데 그런게 필요했다. 어쨌든 와인을 사고 우리는 택시를 잡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6 12:4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