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슈퍼맨이 응원하는 구단
마블 코믹스와 함께 미국 만화 산업을 양분하는 DC 코믹스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은 누가 뭐래도 슈퍼맨일 것입니다. 슈퍼히어로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슈퍼맨은 고향 행성의 멸망을 피해 아기 때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입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미국 캔자스주의 시골 마을입니다. 자연스레 그는 캔자스주의 캔자스시티를 연고로 하는 야구팀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응원하게 됩니다.
실제로는 미주리주와 캔자스주의 경계에 걸쳐 있는 도시를 대표하는 로열스는 1969년 창단됩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팀으로 성장한 로열스는 70년대에 빛나는 전성기를 누립니다.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자 통산 3000안타를 돌파한 3루수 조지 브렛은 그 당시 로열스를 넘어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습니다. 그는 1985년 자신의 경력 중 한 시즌 최다 기록인 30홈런을 때려내며 팀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끕니다.
브렛은 이후에도 1990년 타격왕을 차지하는 등 활약을 이어나갔으나 로열스는 부진의 늪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투자를 아끼지 않던 구단주가 사망하면서 로열스는 더는 선수들의 연봉을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결국, 실력 있는 선수들이 대거 팀을 떠나면서 약체로 전락한 로열스는 무려 28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맙니다. 왕실을 의미하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모습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 이역만리의 괴짜 팬
스몰마켓인 연고지, 좋지 않은 성적, 한국인 선수 비소속 등의 이유로 대한민국의 로열스 팬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대신 LA 다저스,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등 여러 인기 구단들이 한국 팬들의 흥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려 20년간 묵묵히 로열스를 응원하는 이가 한국에도 한 명 있었습니다. 현재는 신세계면세점 MD 부문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성우 씨입니다.
이성우 씨는 학창시절 영어공부를 위해 주한미군 방송 AFN Korea의 전신 AFKN을 시청하곤 했습니다. 다양한 스포츠 뉴스들을 접하면서 알게 된 로열스의 경기장과 불꽃놀이를 보고 매료된 그는 미국 로열스 팬 사이트에서도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열혈팬이 됩니다. 로열스 구단과 팬들은 바다 건너 타국에서 응원을 보내는 이성우 씨를 환영했고 그를 2012년 올해의 팬으로 선정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그의 응원이 통했던 걸까요? 2014년 로열스는 호성적을 기록합니다. 구단은 내친김에 한 번도 로열스 구장을 방문한 적 없는 이성우 씨를 위해 비행기 표를 선물하며 초청합니다. 놀랍게도 그가 방문한 날부터 로열스는 무려 8연승을 내달리며 잠시나마 지구 1위를 탈환하기까지 합니다. 로열스 팬들은 이성우 씨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거나 여권을 뺏어야 한다며 유쾌한 농담을 하게 됩니다.


3. 불펜 3대장
2014년 로열스는 메이저리그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옵니다. 빠른 주력과 든든한 수비력을 겸비한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점수를 짜내는 스몰볼을 시도한 것입니다. 알렉스 고든, 로렌조 케인, 제로드 다이슨 등 타선, 제임스 실즈, 요다노 벤추라 등 선발진까지 여러 선수가 활약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빛났던 것은 3명의 중간계투 선수 켈빈 에레라, 웨이드 데이비스, 그렉 홀랜드였습니다.
모두 강력한 속구를 구사했으며 각각 체인지업, 커브, 슬라이더를 주 무기로 구사하는 세 선수는 로열스의 뒷문을 그야말로 철벽으로 만듭니다. 70이닝 동안 방어율 1.41을 기록한 에레라가 선봉을 맡고 72이닝 동안 방어율 1.00, 109탈삼진을 기록한 데이비스를 거쳐 62이닝 동안 방어율 1.44, 46세이브를 거둔 홀랜드가 경기를 마무리합니다. 로열스의 선전은 세 선수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로열스는 당시 AL 중부지구를 지배하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위협하는 강팀으로 성장합니다. 비록 맞대결에서의 열세로 인해 아쉬운 2위 자리에 만족해야 했지만 89승 73패를 거두며 와일드카드 1위를 차지하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게 됩니다. 무려 29년 만에 이룬 성과였지만 마냥 기뻐할 순 없었습니다. 유수의 강팀들이 격돌하는 가을야구에서 로열스의 전력은 쉽사리 우위를 점치기에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4. 거침없던 질주
빌리 빈 단장의 머니볼로 유명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치른 와일드카드전. 연장 12회 말 끝내기 안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 로열스는 파죽지세로 전진합니다. MLB 최고의 선수 마이크 트라웃과 살아있는 전설 알버트 푸홀스가 버티는 LA 에인절스, 팀 홈런 1위 팀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단 1패도 기록하지 않은 채 메이저리그 최초 8연승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된 것입니다.
1985년 우승 이후 처음으로 돌아온 월드시리즈 무대에서 맞닥뜨린 상대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였습니다. 명장 브루스 보치가 이끄는 자이언츠는 당대 최고의 포수 버스터 포지, 당대 최고의 투수인 클레이튼 커쇼의 라이벌 매디슨 범가너 등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2010년, 2012년 우승으로 생긴 짝수해 징크스를 이어가고자 한 자이언츠와의 승부는 12년 만에 열리는 와일드카드 진출팀 간의 월드시리즈였습니다.
로열스는 오를 대로 오른 기세, 다시 방문한 이성우 씨의 응원 등을 안고 치열한 승부를 펼칩니다. 두 팀의 명승부는 마지막 7차전까지 이어졌지만, 우승은 자이언츠가 차지하고 맙니다. 1차전 7이닝 1실점 선발승, 5차전 완봉승, 7차전 5이닝 무실점 세이브를 거두며 괴물 같은 활약을 펼친 범가너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로열스의 도전은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미완으로 그치는 듯했습니다.


5. 다시 거머쥔 영광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한 한해를 뒤로하고 맞이한 2015년. 로열스는 한층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과시한 불펜 3대장과 타선, 새로 영입된 켄드리 모랄레스, 에딘슨 볼케즈 등의 활약, 포스트시즌을 대비한 쟈니 쿠에토, 벤 조브리스트의 트레이드 등의 호재들이 연달아 터집니다. 시즌 최종 성적은 95승 67패로 AL 승률 1위였습니다. 작년보다 강해진 로열스는 다시 한번 우승에 도전합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연달아 꺾은 후 월드시리즈에서 만난 상대는 뉴욕 메츠였습니다. 1969년 톰 시버, 1986년 드와이트 구든의 활약으로 놀라운 우승을 거두며 ‘Amazing Mets’라는 별명을 얻은 메츠는 제이콥 디그롬, 노아 신더가드, 맷 하비 등 젊은 나이와 강력한 구위를 자랑하는 선발진을 앞세운 팀이었습니다. 로열스와 메츠는 각각 30년, 29년 만의 우승을 위해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칩니다.
1차전부터 14회 말까지 가는 접전을 펼친 두 팀이었지만 로열스엔 메츠에 없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경험입니다. 젊은 메츠의 선수들은 수비에서 연달아 실책을 기록하며 자멸하기 시작합니다. 작년의 패배를 교훈 삼아 노련한 모습을 보여 준 로열스는 결국 4승 1패로 MLB 정상에 오릅니다. 우승 행진에선 약 80만 명의 시민들이 기쁨을 만끽합니다. 바쁜 회사 업무로 미국에 가지 못한 이성우 씨 역시 한국에서 환호합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우승을 위해 2년간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로열스는 아쉽게도 이후 부진합니다. 한계에 다다른 연봉 구조, 우승 주역들의 이적, 홈런의 시대로 변화한 리그 경향 등에 고전하며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에 그치고 만 것입니다. 2019시즌을 마친 후엔 우승을 이끌었던 덕장 네드 요스트 감독의 은퇴까지 닥친 로열스. 하지만 묵묵히 리빌딩에 돌입하며 다시 비상할 때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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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한편으론 이역만리의 괴짜 팬 한 사람까지도 구단의 스토리로 만드는 게 메이저리그의 힘이란 생각도 들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성우 씨가 했던 말입니다. 최근 팬서비스 문제로 비판받았던 KBO 선수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글은 유로 2004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18 02:4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