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우리가 사랑한 언더독 - 19. 그 곳엔 해답이 있었다

1. 과정을 믿어라
최근 미국 프로스포츠에서 유행을 넘어 필수로 자리 잡은 전략은 바로 탱킹입니다. 총탄과 포탄을 버티며 전진하는 전차에서 비롯된 이름처럼 탱킹은 수모와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행위입니다. 향후 유망주 지명에 유리한 순번을 얻기 위해서 패배를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스포츠의 기본 원리를 위배한다는 점에서 팬들의 원성과 언론의 비판이 쏟아지곤 합니다.
2010년대 NBA에서 탱킹으로 가장 유명한 팀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입니다. 세븐티식서스는 스스로 전력을 약화하며 미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다 기록인 28연패를 당하는 등 온갖 굴욕을 경험합니다. ‘필리건’이라 불리며 미국에서도 가장 열성적인 응원으로 유명한 필라델피아 시민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Trust the Process’라는 구호를 내세운 세븐티식서스는 인고의 세월을 보냅니다.
탱킹은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매우 세심한 노력과 든든한 기반이 필요합니다. 유망주들의 지명 및 육성, 악성 계약의 흡수 및 소진, 팀 스피릿의 정착 및 보존 등 복잡하고 다양한 과제를 수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저조한 성적으로 인한 수입 감소를 버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역사에 길이 남을 세븐티식서스의 탱킹을 지탱하던 것은 그들의 유서 깊은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영광과 아쉬움이 공존한 과거
세븐티식서스는 1939년 창단되어 1949년 NBA에 가입합니다. 세븐티식서스는 1949년부터 22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정도로 강호였으며 그 주역은 한 경기 100득점, 한 경기 55리바운드 등 불멸의 기록을 보유한 전설적인 센터 윌트 체임벌린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체임벌린의 라이벌이자 NBA 파이널 우승 11회의 사나이 빌 러셀이 이끄는 보스턴 셀틱스에 밀려 우승은 단 2번에 그치고 맙니다.
개인적인 성향으로 팀워크를 저해하던 체임벌린이 LA 레이커스로 떠난 이후 세븐티식서스는 1972/73시즌 9승 73패라는 역대 최악의 시즌을 보내는 등 암흑기를 맞이합니다. 70년대를 우울하게 보내던 세븐티식서스는 ‘Dr.J’ 줄리어스 어빙과 모제스 말론을 영입하면서 다시금 위용을 회복합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우상으로 꼽을 정도로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던 어빙과 골밑을 지배하던 말론은 당대 최고의 선수로 꼽힙니다.
그러나 세븐티식서스는 이번에도 1번의 파이널 우승에 그칩니다. NBA 통산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 카림 압둘 자바와 역대 최고의 포인트가드 매직 존슨의 LA 레이커스, 매직의 라이벌이자 역대 최고의 스몰포워드로도 꼽히는 래리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빙과 말론의 은퇴 이후 홀로 팀을 이끌던 찰스 바클리가 전력에 불만을 품고 피닉스 선즈로 떠나면서 또다시 우울한 세월을 보냅니다.

3.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15세의 미혼모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소년. 그는 가난한 형편과 패싸움으로 재판까지 받은 전력에도 불구하고 농구선수의 꿈을 위해 노력합니다. 비싼 농구화를 어렵사리 구해준 어머니, 불량아라는 평판에도 자상하게 그를 감쌌던 대학 농구팀 감독 등은 그에게 사랑과 믿음을 보냅니다. 마침내 1996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세븐티식서스에 입단한 소년. 그가 바로 ‘The Answer’ 앨런 아이버슨입니다.
가라앉아 있던 팀에 혜성같이 등장한 아이버슨은 곧 필라델피아의 시민들을 매료시킵니다. 엄청난 스피드, 화려한 드리블, 지칠 줄 모르는 체력, 그리고 득점에 대한 맹렬한 투지를 유감없이 뽐내던 그는 일약 리그에서 손꼽는 스타로 성장합니다. 천하의 조던을 상대로 떠는 기색 하나 없이 크로스오버 드리블과 점프슛을 완벽하게 성공시키는 당돌한 새내기에게 신인왕 수상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특유의 콘로우 헤어스타일과 힙합 패션으로 문화적 아이콘으로도 떠오른 아이버슨은 타고난 반골이었습니다. 그는 거침없는 언변으로 사무국 및 언론과 날을 세우는가 하면 높은 수위의 가사가 담긴 랩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팀 연습을 게을리하고 주전 욕심이 지나치다는 지적까지 받던 그는 차츰 논란의 중심이 됩니다. 세븐티식서스 역시 생각만큼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며 아이버슨을 향한 비난은 점점 거세집니다.

4. 용장과 악동의 만남
1997년 세븐티식서스는 래리 브라운 감독을 선임합니다. 훗날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Bad Boys’ 2기를 이끌며 파이널 우승을 거두는 브라운 감독은 정교한 공격 전술 및 탄탄한 수비 전술에 모두 능한, NBA를 대표하는 명장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불같은 성격과 완고한 뚝심을 자랑하는 브라운 감독이 좌충우돌 말썽꾸러기 아이버슨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자존심 강한 두 천재는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입니다. 브라운 감독은 연습 시간을 지키지 않으며 지각과 불참을 일삼던 아이버슨에게 일갈합니다. 아이버슨 역시 연습보다 경기에 신경 쓰라고 맞대응하며 둘의 대립은 격화됩니다. 결국, 브라운 감독은 아이버슨의 트레이드를 시도하기까지 했으며 세븐티식서스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아이버슨은 마침내 브라운 감독의 지시를 수용하고 맙니다.
사실 브라운 감독은 누구보다 아이버슨의 재능을 높이 사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기용하기 까다로운 아이버슨을 위해 맞춤 전술을 준비해줄 정도였습니다. 작은 신장 때문에 수비에 어려움을 겪던 그를 위해 수비 전문 선수를 파트너로 지정한 후 포인트가드 대신 슈팅가드 포지션으로 배치하여 공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아이버슨 역시 브라운 감독의 노력에 감사하며 둘의 관계는 차츰 돈독해집니다.

5. 처절했던 도전
2000/01시즌 세븐티식서스는 마침내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버슨은 정규 시즌 MVP와 올스타전 MVP를 차지하며 최고의 자리에 등극했고 브라운 감독 역시 올해의 감독상을 받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올해의 수비수에 오른 블록 슛의 달인 디켐베 무톰보, 올해의 식스맨으로 선정된 수비형 포인트가드 애런 맥키 등의 활약까지 더해지면서 세븐티식서스는 18년 만에 파이널에 진출하는 쾌거를 올립니다.
결승전에서 마주한 상대는 명문 LA 레이커스였습니다. 당시 전년도 챔피언을 차지한 레이커스는 NBA 역사에 손꼽힐 강팀이었습니다. 조던과 함께 시카고 불스의 ‘3-Peat’ 2번을 지휘한 명장 필 잭슨 감독, 역대 최고의 센터 중 하나인 ‘Most Dominant Ever’ 샤킬 오닐, 조던 이후 최고의 슈팅 가드 중 하나인 ‘Black Mamba’ 코비 브라이언트는 플레이오프 12경기를 전승으로 돌파한 파죽지세의 괴물들이었습니다.
‘Miller Time’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 ‘Air Canada’ 빈스 카터의 토론토 랩터스, ‘Sugar Ray’ 레이 앨런의 밀워키 벅스 등과 혈투를 벌이며 올라온 세븐티식서스의 선수들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버슨은 언제나처럼 온몸을 던졌고 1차전에서 레이커스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패배를 안겨줍니다. 비록 이후 4연패를 당하며 준우승으로 마무리했지만, 그의 불꽃 같은 투혼은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브라운 감독이 팀을 떠난 후 잦은 부상과 노쇠화에 신음하던 아이버슨 역시 여러 팀을 전전하는 저니맨 신세가 되어 아쉬운 은퇴를 맞이합니다. 그 후 어중간한 성적을 거두던 세븐티식서스는 글 서두에 언급했듯 탱킹을 감행했고 조엘 엠비드, 벤 시몬스 등의 유망주를 얻습니다.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고무된 세븐티식서스는 다시금 영입에 박차를 가했고 현재 유력한 NBA 우승 후보 중 하나로 성장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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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Everybody was saying we couldn't win because of our size. But it's not about the size on paper, it's about the size of your heart." 흔히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로 알려진 아이버슨의 명언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학우 여러분도 담대한 마음을 품고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다음 글은 UFC와 정찬성 선수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기대해 주세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01 13:4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