돔 루이스 다리 주변에서 다리 밑 흘러가는 물처럼 시간을 보냈다. 조물주의 조형물과 인간의 조형물 모두를 즐기고 싶던 나는 다리가 보이고 강이 보이는 최적의 장소를 찾았고, 한참 강 주변을 떠돌다 드디어 강변 조그만 레스토랑에서 내 욕구를 채워줄 만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밴쿠버에서 교환학생을 왔다는 친절한 웨이터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침 한산하던 시간이라 우리는 그대로 해가 돔 루이스 다리 건너편에서 도루 강 위로 옮아갈 때까지 캐나다의 로키와 포르투의 돔 루이스, 포트 와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오랜 시간 동안 한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낯선 이방인에게 주인은 서비스와 따뜻한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강 건너를 바라보면 빽빽히 들어선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보인다. 그러나 세월을 맞은 턱에 흰색은 상아색 혹은 회색으로, 빨간색은 연한 벽돌색, 초록색은 눅눅한 풀빛으로 빛이 바래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분명히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온전한 색으로 활기찬 거리였으련만 지금 빛이 바랜 이 순간에도 역시 잔잔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빛바램의 미학이다.

가끔 카메라를 들고 출사를 나갈 때면 어김없이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노년을 맞이한 이들이다. 그들의 빛바랜 머릿결과 세월이 스쳐간 모래언덕 같은 주름살 사이로는 청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연륜이 흐른다. 그러한 것들은 강 건너편의 빛바랜 건물들에 비슷한 색의 새 페인트를 칠한다고, 청년에게 노인 분장을 시킨다고 얻을 수 없다. 오로지 빛바램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도루 강변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계속 건너편의 건물들을 바라본다. 문득 든 생각. 빛바램의 미학은 포용이다.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색들이지만 빛이 바래면 어느 순간 파스텔톤으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청년들을 당황케 하는 문제들을 담담하고 의연하게 마주하는 노인들이 있다. 빛이 바래다보면 본질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나보다.

그러나 파스텔 톤의 페인트를 새 건물에 칠한다고, 청년의 이마에 주름을 애써 새기고 머리를 하얗게 물들인다고 그들의 빛이 바래지 않듯 빛바램의 미학 역시 자연스럽게 빛이 바래지 않는다면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빛이 바래지 않은 새 것들은 새 것대로, 청춘은 청춘대로 그 가치가 있다. 청춘을 보내고 있는 내가 해야할 것은 빛바램의 미학을 동경하는 것이 아닌 청춘을 아름답게 청춘대로 보내고 아름답게 빛바래가며 아름답게 스러지는 것이다.

이번 여행 중 만났던 오 세브레이로와 피스테라의 노을을 잊을 수 없다. 노을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그림자 속으로 내몰고서는 홀로 남아 강렬한 붉은 빛을 내다 이내 자신도 어둠 속으로 묻혀버린다. 노을은 오직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찰나의 순간 동안 펼쳐지는 황홀경이다. 모든 것을 달구는 하얀 태양빛이 바래면 노을이 된다. 노을은 한낮의 태양만큼 뜨겁지 않다. 감동이 있다.

머리 위에 있던 해는 어느새 바다를 향해 있었다. 그러자 건너편 건물들을 비추던 하얀 빛은 빛바랜 노란 빛으로 바뀌고 강물에는 황금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 카페에서 바다를 향해 걷기로 했다. 870km를 걸어 피스테라에서 지는 해를 보았을 때처럼 대서양으로 지는 해를 다시 내 두 발로 걸어 바라보고 싶었다. 바다로 향하다보면 중간에 조그만 빛바랜 성당이 있을 것이다. 빛바랜 성당에서 저녁 미사에 참례하고, 빛이 바래가는 오늘의 해를 볼 예정이다. 유달리 친절했던 종업원에게 팁을 남기고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하루하루 빛이 바래가는 내 인생처럼 지구에서 제일 큰 빛바램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01 21:4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