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버라이어티하다. 내가 아무 일도 만들지 않으면 삶은 직접 내 손을 잡고 나를 폭풍 속으로 이끌곤 했다. 그리고 폭풍에 맞서 싸우는 조각배 한 척이 되느냐 아니면 해일을 타고 오히려 폭풍을 즐기는 서퍼가 되느냐 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여권을 잃어버렸다. 순례길에 오르며 공항에서 산 만다리나덕 슬링백과, 작년에 사서 애지중지하던 레이밴 선글라스와, 꽤 오래도록 끼고다니던 AKG 이어폰과, 핸드폰의 생명줄이던 보조배터리와 함께 여권은 사라졌다. 순례길을 걸으며 하루하루 도장을 찍어나가던 순례자 여권도 가방 속에 있었다. 늘 내 어깨에 조그만 무게를 실어주던 슬링백의 부재로 허전함을 느꼈을 때에서야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아차렸다. 지갑은 다행히 몸에 소지하고 다녔기에 돈은 무사했지만, 여권이 사라짐에 따라 나는 머나먼 이베리아 반도 속 이름도 정체성도 없는 누군가가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당장 다음 날 나는 세비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여권이 없음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뒤틀어짐을 의미했다. 어제 가방을 찾아 헤매다 결국 못 찾고 경찰서에 분실신고를 했다. 경찰에서는 하루 더 기다리면 분실물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 나중에 찾아올 것을 권했다. 그리고 오늘 경찰서에 다시 방문했다. 일말의 희망을 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들어온 분실물은 없었다.

혹시 어디엔가 버려져있지는 않을까 싶어 택시를 타고 가방을 잃어버린 곳으로 갔다. 비릿한 바다 내음이 풍기는 포르투 주변의 항구 마을이었다.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가방을 잃어버린 날처럼 우산을 쓰고 바닷가를 따라 쭉 걸으며 쓰레기통도 뒤져보고 풀숲도 뒤져보았다. 물론 풀숲에서 찾은 2유로 짜리 동전 하나 뿐 아무런 소득은 없었다. 만일 가방이 이 곳에서 버려졌다면 지금쯤 저 대서양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주운 2유로 짜리 동전을 가지고 근처 카페로 가서 에그타르트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켰다.

에스프레소는 쌉쌀했다. 하지만 달콤한 에그타르트와 함께라면 그 쌉쌀함마저 매력적이다. 에그타르트는 혀가 녹아버릴 것처럼 달았다. 하지만 쌉쌀한 커피와 함께라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가볍게 아침을 때우고 카페에서 나오니 어느덧 비가 그치고 볕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은 과연 절망인가 생각해보았다. 절망적일만도 하다. 여권이 없는 나는 이베리아 반도에 떨어진 이름도, 국적도 없는 아시안일 뿐이다. 나의 까미노 여정을 증명해줄 순례자 여권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지금 이 순간 절망을 느끼고 있진 않다. 항구의 시원한 바람과 건너편 도시를 비추는 햇살이 반가웠고 내 마음은 물결 따라 잔잔히 흔들리는 배들마냥 평온했다. 절망이라기보다는 희망에 가까웠다.

모든 것이 꼬였다. 삶의 폭풍은 나를 다시 한 번 시험에 들게 했다. 그러나 폭풍 속에서도 나는 미친 사람처럼 모든 것이 즐겁다. 2013년 수능의 24번 영어지문이 떠올랐다. "The fact that the ground is wet and there are mud puddles dotting the landscape means nothing to the dogs." 외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행복에 관한 글이다. 비가 오고 발을 더럽힐만한 진흙 웅덩이가 곳곳에 포진한 날에도 개들은 행복하게 뛰놀 수 있다는 지문이었다. 총체적으로 개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지양해야겠지만 진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세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내 상황은 폭우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는 밤과도 같다. 심지어 어제 여권을 찾아다니다 미끄러져 오른쪽 무릎을 긁어먹기도 했다. 하지만 걱정 없는 나를 보며 확실히 순례길 동안 뭔가가 변하긴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일은 리스본의 한국 대사관으로 가서 여행 증명서를 발급 받을 것이다. 애초에 리스본은 갈 생각이 없었지만 삶은 나를 리스본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있기나 할지는 아무도 모르긴 하지만 결국 나는 수 만리 떨어진 타향에 있고 무엇 때문에 어디를 가든 그것은 여행의 일부분이 된다.

새로운 도시를 만난다는 생각에 나는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오늘은 포르투에서의 마지막 날을 즐길 것이다. 쓰디쓴 에스프레소와 함께라면 완벽한 에그타르트의 도시, 포트 와인의 도시, 물의 도시, 빛바랜 강변의 건물들이 아름다운 도시, 잃어버린 내 가방과 여권이 떠돌고 있을 도시이다. 여권과 가방을 놓고 가되 그것보다 어쩌면 더 클 만한 추억을 들고 이 도시를 곧 떠난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01 19:5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