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31)> 코임브라 성당 안에서 마주친 하늘과 바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게 있어서도 특별한 색이 몇 개 있다. 파란색 역시 나에게 특별한 색이었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에야 두 말 할 것 없이 라이벌 대학의 색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그 이전 나에게 파란색이란 바다의 색, 하늘의 색이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언제나 파란 하늘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름들 사이를 뚫고 얼굴을 내미는 파란 하늘이라든가, 870km를 주욱 걸어와 마주하는 파란 바다는 지친 나에게 나에게 힘을 실어주곤 했다.

한국을 떠나온 이래 처음으로 하루종일 비가 내리던 날, 코임브라에 도착했다. 코임브라는 포르투갈 제 3의 도시임과 동시에 옛 수도다. 유럽에서 제일 오래된 대학 중 하나가 있으며 포르투갈의 혼이 담겨있다는 노래 '파두'가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코임브라의 첫 인상은 비 때문인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지도를 대강 보고 잡은 숙소는 꽤나 높은 언덕에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가며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에 흠뻑 젖어 언덕을 오르는 일은 까미노 위 경험 중 일부를 떠오르게 했지만, 까미노를 죽도록 그리워하던 그 상황에서도 썩 유쾌하지 않았음은 변함이 없었다. 더군다나 닳아버린 등산화 밑창이 매끈한 돌로 포장된 길에서 미끄러져 무릎을 한번 찧고 나니 여행객으로서 맞이한 첫 날 첫 기억은 최악이었다.

약 3.5km에 달하는 도시 속 등산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자 완전히 뻗어버렸다. 가만히 누워서 흐린 하늘이 비치는 창문을 바라보며 까미노 위의 파란 하늘과 쭉 뻗은 길을 그리워했다. 내가 향수를 느끼던 대상은 편하고 아름다운 길이었던가 아니면 순례길 그 자체였던가 잠깐 생각해보았다.

몸을 씻고 두 시간쯤 가만히 누워있으니 피로가 좀 가셨다. 그래도 왔으니 한번 둘러보아야겠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라 다시 도시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무 계획 없이 발걸음 닿는대로 걸었다. 30분쯤 걸었을까, 이윽고 강이 나왔다. 날이 흐리고 비가 와 물은 파랗기보다는 짙은 갈녹색에 가까웠지만 흐르는 물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갈매기들이 난간 위에 줄지어 앉아있던 강가를 따라 걷다보니 산타 크루즈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이정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정표를 따라 산타 크루즈 성당으로 갔더니 한 시간 반 정도 후에 저녁 미사가 있다고 한다.

저녁 미사에 참례하기로 하고 성당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역시나 화려한 내부. 도금된 성물들과 정교한 조각들은 스페인의 성당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착각을 주던 스페인의 성당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묘한 이질감에 성당 내부를 둘러보는데 내내 떠오르던 까미노의 푸른 하늘과 바다가 설핏 스쳐 지나갔다.

성당에서 그렇게 그리웠던 까미노의 바다와 하늘을 보았다. 성당의 내벽은 파란색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 타일, 아줄레주로 도배가 되어있다. 미술 시간 교과서에서나 보던 아줄레주가 아닌 내 첫, 살아있는 아줄레주였다. 그림의 양식은 일반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화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한 가지 색상만 사용된 덕에 훨씬 단순하다. 그러나 오로지 파란색으로만 그려진 그림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하늘과 바다가 그리웠던 탓인지 그 단순함은 왠지 신비하게 다가왔다.

흐린 하늘 아래서 우울하게 까미노를 걷다보면 구름 사이 손바닥만한 푸른 빛이 그리 반가울 수 없다. 비록 비바람이 불어 유서깊은 거리마저도 슬럼가로 만들어버리는 날씨였지만 조그만 아줄레주 하나로 내 마음은 가득차게 되었다.

내게 포르투갈의 색은 늘 그 국기의 색마냥 붉은색과 초록색이었다. 여태 와본 적도 없었고, 포르투갈에 대한 나의 기억은 오로지 2002년 월드컵 예선전에서의 자주색 유니폼이었을 뿐이니 그럴 법도 하다. 오늘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포르투갈의 다른 색깔 하나를 만났고 파란색은 내게 조금 더 의미있는 색이 되었다.

아줄레주를 한참동안 감상하다 미사가 끝나고 포트 와인이나 한 잔 해볼까 하는 생각에 성당 바로 옆 카페로 들어갔다. 포트 와인을 홀짝대며 늘 그렇듯 기억을 정리하고 있는데 기타와 포르투갈식 기타를 든 남자 둘과 코임브라 전통 망토를 걸친 백발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오신다. 포르투갈 민요인 파두 공연이었다. 코임브라에서 언제건 파두 공연을 보고 가고자 했는데 우연히 들어온 카페에서 운좋게도 파두 공연을 보게 되었다.

파두는 구슬프다. 코임브라와 리스본 두 곳이 파두 공연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두 지역 중 코임브라의 파두가 특히 슬프다고 한다. 포르투갈어를 못 하기에 당연히 알아들을리 만무했지만 기타의 구슬픈 음색과 가수분의 호소력 짙은 발성에는 애절한 울림이 있었다. 기억을 정리하던 저녁 시간에 새로운 기억이 쌓여버려 글을 잠깐 멈추고 파두 공연에 빠져들었다.

3분 같던 파두 공연이 끝나자 시장기가 밀려왔다. 점심도 제대로 안 먹은 탓이다. 코임브라 맛집을 검색해볼까 하다 공연의 감동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감정을 유지하며 비 오는 밤거리를 걷기로 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밤거리를 청승떨며 헤집고 다녔다. 발길은 나도 모르게 강가로 향했다. 강이 슬슬 보일 무렵 조그만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사람 둘이 지나가면 꽉 찰 것 같던 흔한 골목에는 웬일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작은 식당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선 것이 보였다. 마침 만난 골목식당이 반가워 덩달아 줄을 섰다. 아무리 기다려도 줄이 줄지를 않아 함께 줄을 서던 사람에게 물어보니 오픈 시간까지는 40분 정도가 남았단다. 제대로 찾아온 느낌이다.

40분을 기다려 들어간 식당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돼지 등뼈찜과 돼지갈비에 돼지뼈 수프와 밥이 곁들여 나오는 요리에다가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한국의 감자탕과 돼지 생갈비가 애매하게 떠오르는 맛이었지만 꽤나 훌륭했고 기분 좋게 차오르는 술기운을 느끼며 다시 밤거리로 나섰다. 거리의 악사는 타이타닉 OST를 멋들어지게 연주했고 파두의 감동과 조금의 술기운은 거리의 분위기와 섞여 한낮의 축축함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발길이 다시 닿은 곳은 산타 크루즈 성당 앞이었다. 성당 문은 닫혀있었지만 성당 옆 카페는 아직 열려있다. 다시 카페에 들어가 이번에는 화이트 포트 와인을 주문했다. 레드 포트 와인은 질 좋은 브랜디의 느낌이 났고 화이트 포트 와인에서는 아이스 와인과 아몬드 향이 풍겼다.

시간대도 완벽해 오늘의 두 번째 파두 공연이 곧 시작되었다. 같은 레퍼토리였지만 주는 울림은 역시나 깊었다. 두 번째 파두 공연과 아몬드 향이 나는 와인 한 잔으로 고된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희노애락이 모두 담긴 날이었다. 끝이 좋았기에 모두 좋았던 날이었다. 낑낑대고 미끄러져가며 올랐던 숙소까지의 오르막은 여전히 낑낑대고 미끄러지며 올랐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비바람이 불고 흐리던 날이었지만 그토록 바라던 하늘과 바다의 파란색을 보았다는 사실은 오늘도 나를 더없이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길을 걸으며 한없이 단순해지기를 원했다. 주변이 온통 캄캄해도 작은 촛불 하나가 있다면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리고 오늘 아줄레주는 마치 어둠 속 촛불과도 같았다. 그 하나로 나는 행복의 실마리를 잡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제 단순해졌으니 마음 속에 촛불을 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언젠가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지 않아도 마음 속 촛불 하나가 있다는 사실에 언제나 행복한 사람이기를.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07 03:26: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