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흉의 근원이라던 박주영을 뺀 벨기에전을 끝으로 한국의 브라질 월드컵은 끝났다. 후반 내내 한명이 빠져있던 벨기에를 상대로 0:1 패배. 변명이 필요없는 완패다.
온 언론과 똥티즌들이 그렇게 부르짖고 염원한 대로 박주영은 90분 내내 기용되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예상대로 김신욱은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찬스메이킹도 하지 못했고 전반 30분 이후로는 경기장에서 지워졌다. 그럼에도 김신욱은 여전히 영웅이다. 이 저열한 언론의 프레이밍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김신욱은 박주영보다 나았나?
오늘 김신욱은 70분 동안 득점 0 , 도움 0 , 슈팅 0, 파울 1을 기록했다. 만흉의 근원으로 지적되는 누군가와 아주 비슷한 스탯이지만 왜 아무도 이 점을 지적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스탯 외적인 경기 내용이 뛰어났나? 전혀. 나의 생각이 편향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 하에 전후반 70분까지의 경기 풀영상을 오직 김신욱의 활약도에만 초점을 맞추어 다시 봤다. 결과는 뭐 생각한 대로였고.
- 포스트 플레이
김신욱의 강점은 역시 머리다. 오늘도 벨기에의 장신 선수들과 밀리지 않는 경합을 펼쳤다. 문제는 경합만 펼쳤다는 것이다.
포스트플레이어는, 그를 거쳐서 2선의 공격수 혹은 상대 수비 뒷공간을 파고드는 공격수에게 공을 연결시켜 주어야만이 가치를 지닌다. 예를 들어 우리 수비 쪽에서 길게 찔러준 볼을 김신욱이 2선의 구자철에게 떨궈주고 거기서부터 공격이 전개된다거나, 길게 찔러준 볼을 가볍게 흘려줘서 뒷공간을 파고드는 손흥민이나 이근호에게 연결해주는 장면이 나와야 김신욱의 투입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70분 동안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볼의 소유권이라도 뺏기지 말았어야 했지만, 두 개의 파울을 얻어낸 것을 제외하면 그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 잘해보여.
하지만 김신욱의 플레이는 잘해보인다. 벨기에의 수비 두 명과 내내 대등하게 싸웠다. 그럼 된거 아닌가?
전혀. 벨기에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김신욱이 선발로 나선 시점에 한국은 이미 발밑을 이용해서 원투로 적 수비진을 쪼개고 들어가는 전술을 어느정도 포기한 것과 다름 없다. 한국이 적진을 유린할 수 있는 방법은 위에 언급한 김신욱의 포스트 플레이 뿐이다. 그럼 벨기에는 그것만 막으면 되는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신욱을 거친 공이 단 한 번도 우리 선수에게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두 명의 수비를 붙이는 벨기에의 전술은 전혀 리스크가 없는것이 되어버렸다. 중반 이후 김신욱의 포스트플레이가 먹히지 않자 발밑으로 공격전개를 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지만, 발밑에 강점이 없는 최전방 공격수를 두고 그런 공격을 펼치는 것은 오히려 벨기에 입장에서 더 막기 쉬운 공격패턴일 뿐이었다.
그럼 한 번 들여다보자. 김신욱한테 수비가 둘씩 붙으니 이득 아니냐고? 그것이 이득이 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는 성립해야 한다. 수비가 둘 붙어서 공간이 열린 그 곳에, 김신욱이 경합을 이겨내고 볼을 배급해주는 것이 첫째. 혹은 수비 둘을 끌어낸 상황에서 2선의 우리 공격수에게 안정적으로 볼을 연결시켜주어, 2선의 그 공격수가 수비가 빈 공간으로 패스를 찔러줄 수 있어야 하는게 둘째다. 하지만 애초에 어떤 형태로든 우리 선수에게 공중볼을 연결시켜주지 못한 김신욱은 사실상 공격작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애매하게 흐른 공을 줍는 리바운드의 측면에서도 벨기에의 집중력은 한국을 압도했다. 그리고 애초에 우리가 리바운드를 따낼만한 위치로 공을 흘려주지도 못했다.
벨기에의 장신 수비 둘에 둘러싸여 아둥바둥 하는 김신욱은 확실히 듬직해보이고 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다다. 잘해 보이지만, 막상 잘한건 없었다. 김신욱이 오늘 제일 잘한건 상대 선수 한 명을 퇴장시킨 것 하나다. 전반 초반에 몇 번 짠한 공중볼 경합을 보여준 것 외에는 70분 동안 클로킹도 그런 클로킹이 없었다. 특히 전반 30분 이후로는 공 한 세 번 정도 건드려 봤을거다.
- 알제리전은 잘했잖아?
결과적으로 구자철 골의 기점 역할을 했으니 잘 했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렇다고 김신욱이 벨기에전의 열쇠가 될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전반을 3:0으로 마친 알제리는 확실히 후반에 집중력이 해이해져 있었다. 손흥민이 그 틈을 파고들어 개인능력으로 한 점을 만회했지만 바로 한 골을 추가하면서 뭔가 진흙탕 싸움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 때 투입한 김신욱은 알제리가 당황하기에 충분했다. 아마 박주영과 손흥민을 중심으로 수비전술을 짠 알제리는 그와 정반대의 스타일을 지닌 김신욱의 등장에 적잖게 놀랐을 것이다. 그 와중에 구자철의 골이 터졌고 그에 대한 김신욱의 기여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 이후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신을 차린 알제리는 김신욱에게 두 명의 수비를 붙여 공중볼 흐름을 제어하기 시작했고, 투입된지 15분여가 흘렀을 무렵부터는 벨기에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필드에서 지워졌다. 벨기에보다 발밑이 더 강한 알제리 수비수들을 상대로 발밑 연결은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즉, 김신욱이 먹힌 데에는 상대의 방심도 큰 요인이었고, 그마저도 이미 경기 중에 읽히고 막힌 것이다. 아마 알제리가 펠라이니를 대비하기 위해 연습한 것들이 있었기에 더 빨리 적응한게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알제리보다도 제공권이 한 수 위인 벨기에를 상대로 이미 다 읽힌 수인 김신욱이 답이 될거라 나불대던 얘기들을 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오늘의 결과는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 밥줘보단 낫겠지?
여기엔 다분히 결과론적 시각이 반영될수밖에 없는 부분임을 미리 밝힌다.
난 이번 월드컵에서 박주영이 못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결과적으로 못하긴 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제대로 수행했다.
사실 이번 월드컵에서 박주영은 손흥민을 위해 희생됐다. 아마 홍명보가 박주영에게 맡긴 롤은 최대한 수비진을 끌고다니면서 손흥민이 뛰어놀 공간을 만들어주라는 것이었던 것 같다. 밥줘가 가장 많이 까이는 이유가 두경기를 뛰면서 슈팅이 0개라는 점이지만,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다. 자신이 마무리 짓는 역할을 부여받지 않은 공격수는 충분히 슈팅이 적을 수 있다. 오늘 김신욱도 슛은 0개였고, 러시아전에서의 루카쿠도 슛은 1개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카쿠가 휘젓고 지나간 자리에 교체투입된 오리기가 골을 넣으면서 벨기에는 러시아에 이겨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축구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맡은 롤을 잘 수행하면서 세부스탯까지 좋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스탯만 뻥튀기하면서 맡은 롤을 수행하지 못할 바에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는 선수가 더 헌신적인 선수다.
그럼 밥줘가 그런 역할을 했냐고? 다음의 두 영상을 보자.
http://sports.news.naver.com/brazil2014/video/index.nhn?id=85466&listType=game&date=20140618&page=3&gameId=20140618731782&prevDate=20140617&nextDate=20140619
-> 박주영이 두 명의 수비를 끌고 들어가고 나머지 두 명의 수비수에게는 (자신을 막을 것인지 손흥민을 막을 것인지) 선택을 강요하면서 손흥민에게 공간을 열어주는 모습이다. 박주영이 여기서 그냥 오른쪽라인으로 벌리면서 손흥민에게 패스를 받으려 했다면 슛도 때려보고 지금처럼 슈팅 제로라고 욕 먹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박주영의 공격은 더 각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사실상 무의미한 공격이 된다. 지금처럼 손흥민에게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 더 나은 공격찬스를 만들어주는 것이고 이게 박주영이 부여받은 롤인 것이다.
http://sports.news.naver.com/brazil2014/video/index.nhn?id=85474&listType=game&date=20140618&page=3&gameId=20140618731782&prevDate=20140617&nextDate=20140619
-> 심지어 이건 더 결정적인 장면이다. 좌측으로 벌린 위치에서 박주영이 기성용의 롱패스를 손흥민에게 정확히 떨궈주고(이게 포스트 플레이다!) 자신은 바로 좌측 박스 안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손흥민 앞의 수비수는 선택을 강요받게 되고 그렇게 열린 공간에서 손흥민은 완벽한 슛찬스를 잡는다. 정확하게 떨궈준 것만 해도 뛰어난데 곧바로 박스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모습은 왜 박주영이 이번 대표팀의 퍼스트 옵션 공격수일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는 박주영이 세계적인 선수라고 추켜세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현 국대에서 박주영만큼 영리하고 기민한 움직임을 정확성 있게 구사하는 공격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이 모습은 오늘의 김신욱에게 요구됐던 플레이다. 하지만 김신욱은 70분 동안 단 한번도 이런 장면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사람들이 많이 무시하는 점이 있는데, 박주영은 모나코 시절을 거치면서 포스트플레이가 굉장히 뛰어난 선수가 됐다. 물론 김신욱처럼 거구 두명 사이에서 경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워낙 활동반경이 넓다보니 그런 상황을 애초에 잘 만들지도 않을 뿐더러, 1:1 경합에서는 상당히 승률이 높은 선수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저 두 영상에서 손흥민이 한 번은 좋은 찬스를, 한 번은 완벽한 찬스를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효슈팅조차 기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똥티즌들은 날려먹은 손흥민보다 희생한 박주영을 몰아세웠다. 이게 가당키나 한가?
나는 손흥민이야말로 이번 대회의 보이지 않는 워스트 플레이어라고 생각한다. 그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가장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컨디션이 좋았다고 하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된건지, 침착해야 할 상황에 전혀 침착하지 못했고, 너무나 많은 찬스를 무산시켰다. 내가 그를 신랄하게 욕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그래도 우리의 미래는 그의 발에 달려 있고, 이번 실패가 성장의 좋은 밑거름이 될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전 전반전은 우리가 이번 대회에서 가장 잘했던 경기였다. 사실 웬만한 골게터 한 명만 있었으면 한두골은 너끈히 리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월드컵 첫 출전인 손흥민의 오버페이스가 너무 아쉬운 이유다.
김신욱도 이런 식으로 영상을 링크하고 분석해보고 싶었지만, 앞서 말한대로 김신욱은 단 번도 찬스메이킹을 해주지 못했다. 혹시 하이라이트 편집이 안 된 것 뿐인게 아닐까 싶어 풀경기 영상을 전부 다시 봤지만, 내 눈만 아팠다.
- 알제리전에서 아무것도 못한 건 사실이잖아.
그렇다. 알제리전의 전반은 그야말로 폭풍처럼 찌발린 경기였다. 하지만 그게 박주영의 문제일까?
사실 이번 대회 전체적인 워스트를 꼽으라면 이용이다. 알제리전 전반은 이용이 맡는 우리의 우측 측면에서부터 시작된 붕괴가 수비진 전체를 폭파시켰고, 그 결과 제대로 된 공격작업이라고는 할 엄두도 못 낸 45분이었다. 이런 경기 흐름에서는 호날두 할애비를 갖다 놔도 아무것도 못하는게 정상이다. 물론 수비의 핵심은 조직력이기에 모든 책임을 이용 하나에 묻는 것은 가혹하지만, 그래도 가장 핵심적인 원인을 제공한 선수를 꼽으라면 이용을 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러시아전을 어찌저찌 비겨낸 상황에서 알제리전이 사실상 이번 대회의 분수령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이 무너진 전반전의 이용은 안타깝지만 대회의 워스트로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알제리 전반전에는 전부 멘탈이 터져버렸기에 잘 한 선수가 없었다. 졸전의 책임을 박주영에게 묻는다면, 제 역할을 한 선수는 누가 있는가? 박주영을 그렇게 까면서도 이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않는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박주영 까지 말고 이용을 욕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대회 중인만큼 지난 일은 빨리 잊도록 해주는게 응원하는 사람들의 도리이고, 대회가 끝난 후라도 원색적인 비난보다는 건설적인 질타를 해주는 것이 옳다. 하지만 언론과 똥티즌들은 참 된 응원도 하지 않았고, 비난의 대상도 잘못 잡았다. 다들 저 잘났다고 나불대고 있었지만 그 중 제대로 된 놈은 보이지 않았다.
- 홍명보 까야지.
만흉의 근원으로 박주영을 몰아가는 언론의 저열한 프레이밍은 왜 이루어지고 있을까? 하나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홍명보를 까는 기사가 지금 먹히기 때문이다.
엔트리 구성 논란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지만, 그건 차치하자. 어쨌든 언론에게 지금 홍명보는 인맥축구의 수장이 되어야만 한다. 홍명보는 고집만 센 무능한 감독이고 자신들은 그걸 비판하는 펜대가 되어야 부화뇌동하는 대중의 지지와 클릭수를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예ㆍ스포츠만큼 남 까는 기사가 잘 먹히는 분야도 없다.
홍명보를 까기 위해서는 먹잇감과 희생된 영웅이 필요하다. 자연스레 엔트리 논란의 중심에 섰던 선수들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윤석영은 생각보다 너무 잘했다. 이번 대회 포백 중 베스트를 꼽으라면 단연 윤석영이다. 공격작업에서의 정교함이 때론 아쉽기도 했지만, 가장 지치지 않았고, 가장 역동적이었고, 가장 안정적이었다.
역시 제일 만만한 것은 박주영이다. 객관적인 스탯도 별로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기여 따위는 대중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4년마다 한 번 축구 보고 사라질 사람들이 태반인 마당에 심도 있는 분석도 필요 없다. 그냥 까면 된다.
영웅 뽑기도 수월하다. 젊음의 패기로 죽어라 뛴 손흥민, 덩치들 사이에서 고생한 김신욱, 뽀록이든 뭐든 어쨌든 골 넣은 이근호 등은 박주영의 인맥에 밀려 희생된 영웅이 됐다.(이근호는 심지어 오늘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아까 말했듯이 나는 박주영 대신 누굴 욕해야 옳다는 말을 하고 싶은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불의랍시고 비난했던 편가르기를 지금 누가 하고 있는지 고민해보라는 뜻이다.
내 의견이 모두 정답인 것도 당연히 아니다. 다만 반박이든 찬성이든, 본인의 눈과 본인의 머리로 타당한 근거에 기반해 사고한 결과였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으면 발전도 없으니까.
SNS에 누가 올린 글입니다.
축구에 무지한 저는 새로운 시각인 것 같아서 흥미롭게 읽었어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01 12:10: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