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계들이 잠들지 않는 도시
수많은 공장이 쉴 새 없이 가동되고 있는 울산은 대한민국 최대의 공업 도시입니다. 자동차, 조선, 정유 등 산업의 핏줄 역할을 하는 다양한 분야가 울산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울산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인 현대그룹은 대한축구협회와도 깊은 인연을 자랑합니다. 그 때문인지 울산은 최고 수준의 축구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으며 울산 현대는 K리그의 거물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1983년 현대 호랑이라는 이름으로 창단된 울산 현대는 사실 시작부터 울산을 대표하진 않았습니다. 초창기 인천 및 경기도를 연고지로 했으며 강원도로 이전한 후 1990년에 울산에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1996년, 2005년 리그 우승을 포함해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이면서 울산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된 울산은 지역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됩니다.
명문답게 울산 현대엔 수많은 스타가 활약했습니다. 현역 시절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등의 전설적인 선수들을 수비했고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첫 월드컵 원정 16강을 이룬 허정무, 이운재와 함께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는 K리그 통산 최다 출장 기록 보유자 김병지, 통산 110골 54도움을 기록한 ‘가물치’ 김현석, 2005년 시즌 절반만 뛰고도 MVP를 차지한 ‘풍운아’ 이천수 등은 잔디 위를 종횡무진으로 누볐습니다.


2. 철퇴 축구의 신화
울산 현대 역사 중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절은 아마 2012년일 것입니다. 당시 울산 현대를 지휘하고 있던 사람은 김호곤 감독이었습니다. 현역 시절 무려 A매치 120경기에 출전할 정도로 70년대를 대표하는 수비수였던 그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팀을 8강에 진출시킨 바 있었습니다. 2009년부터 울산 현대 감독직을 역임한 그는 몇 년간 많은 비판을 받던 감독이었습니다.
하지만 2011년 리그컵 우승을 기점으로 그의 축구 철학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단단한 수비를 통해 실점을 최소화하고 빠른 역습과 정확한 세트피스로 득점을 얻는 전술을 앞세워지지 않는 축구를 구사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화려한 패스 전개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티키타카와 달리 묵직한 한 방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이 마치 철퇴를 든 장수 같다는 축구 팬들의 찬사가 쏟아집니다.
장신 공격수 김신욱, 골 넣는 수비수 곽태휘 등은 무지막지한 높이로 상대를 찍어 눌렀습니다. 거기에 일본에서 돌아와 엄청난 기량을 선보인 이근호, 빠른 발과 날카로운 크로스를 가진 김승용 등의 선수가 영입되면서 울산 현대는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를 호령하는 구단이 됩니다. 결국, 결승전 3:0 완승과 함께 12경기 10승 2무의 무패 전적으로 2012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머쥐며 아시아 정상에 오릅니다.


3. 호랑이의 눈물
우승 이후 AFC 올해의 선수 이근호, 주장 곽태휘 등 여러 선수가 이적하면서 우려 속에 맞이한 2013년에도 울산의 질주는 계속됩니다. 김신욱은 완전체 공격수가 되어 득점 행진을 이어갔고 신예 김승규는 단숨에 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성장했습니다. 1위를 줄곧 유지하던 울산은 리그 최종전만을 남겨놓게 됩니다. 무승부만 거둬도 3번째이자 8년 만의 K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만난 것은 포항 스틸러스였습니다.
포항 스틸러스는 오랫동안 ‘동해안 더비’라는 이름 아래 울산 현대와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당시 포항 스틸러스의 감독이었던 황선홍 감독은 ‘스틸타카’라고 불릴 정도로 정교한 패스 전개, 유망주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운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단 한 명의 용병 선수 없이 리그 2위를 유지하던 포항 스틸러스는 극적인 역전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울산의 홈구장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펼쳐진 건곤일척의 승부는 팽팽한 흐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주포 김신욱과 특급 용병 하피냐가 경고 누적으로 빠진 상황에서 울산은 특유의 철벽 수비로 버팁니다. 무려 94분 동안 0대0 점수가 유지되어 울산의 우승이 코앞으로 다가온 그 순간 혼전 상황에서 포항 소속 김원일의 결승골이 터집니다. 시즌 내내 든든하던 김승규의 실수가 터진 순간 울산 팬들은 믿을 수 없는 준우승에 눈물 흘리고 맙니다.


4. 암흑시대
“노장은 녹슬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닳아 없어지는 것.” 씁쓸한 한 마디를 남긴 김호곤 감독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 형식으로 경질되고 맙니다. 새로 부임한 조민국 감독은 생소한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내셔널리그 우승을 이끌었다지만 실업팀 경력에 불과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우승을 노렸던 팀을 망가뜨리며 7위로 추락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빗댄 ‘호거슨’, ‘조예스’라는 별명만 남긴 채 경질됩니다.
후임 윤정환 감독은 현역 시절 패스의 달인으로 유명한 선수였습니다. 감독으로서 일본 J리그의 사간 도스를 잠시나마 리그 1위로 끌어올린 그는 많은 기대 속에 울산에 부임합니다. 하지만 첫 시즌 7위, 두 번째 시즌 4위로 어정쩡한 성적, 처참한 경기력 등을 보여줍니다. 결국. 재계약에 실패하며 떠나는 그는 ‘윤할’이라 불리게 됩니다.
부진의 늪에 빠져 있던 구단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이는 김도훈 감독이었습니다. 현역 시절 ‘폭격기’로 불린 대형 공격수였던 그는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아 준수한 지도력을 보여준 바 있었습니다. 옛날 ‘철퇴 축구’가 연상되는 역습 전술을 부활시킨 김도훈 감독에 의해 울산은 쉽게 지지 않는 팀으로 돌아옵니다. 거기에 FA컵에서 19년 만의 결승 진출과 우승을 모두 거머쥐면서 2017년을 멋지게 마무리합니다.


5. 또다시 울다
2018년 잠시 숨을 고른 울산 현대는 2019년 시즌을 앞두고 새로운 얼굴을 대거 수혈합니다. 박지성의 후계자로도 거론된 김보경, 활동량과 킥을 겸비한 신진호, 국가대표 수비수 윤영선, 네덜란드 출신 장신 수비수 데이브 불투이스 등이 차례로 영입됩니다. 팀에 합류한 선수들이 기존에 소속되어 있던 이근호, 박주호, 믹스 디스커루드 등의 선수단과 보여줄 조화를 기대하며 팬들은 리그 개막을 반깁니다.
울산 현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선전을 이어갑니다. 최근 K리그를 지배해 온 전북 현대 모터스, 강등권으로 추락했던 2018년에서 벗어난 FC 서울 등과 선두권 다툼을 꾸준히 이어간 것입니다. 거기에 시즌 중간 J리그에서 친정팀으로 복귀한 김승규가 가세하면서 더욱 탄력을 받은 울산 현대는 리그 최종전을 남기고 1위 자리를 유지합니다. 2013년처럼 비기기만 해도 우승에 성공하는 상황에 만난 것은 이번에도 포항 스틸러스였습니다.
긴장 속에서 펼쳐진 2019년 마지막 경기. 울산 현대는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바로 동점골을 기록하며 팽팽한 흐름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후반전 다시 실점하며 리드를 내준 상황에 전북 현대 모터스가 승리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집니다. 사력을 다해 공격을 진행하던 그 순간 김승규의 스로인 실수가 터지면서 점수는 3대1까지 벌어집니다. 믿기 힘든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페널티 킥 실점까지 내준 울산 현대는 2013년의 악몽을 6년 만에 다시 경험합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리그 베스트11에 주니오, 김보경, 김태환이 선정되었고 그중 김보경은 MVP까지 수상했지만, 너무나도 쓰라린 상처로 다가온 준우승은 경사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좌절과 포기란 단어는 울산 팬들의 사전엔 없는 단어입니다. 모두가 기억하지 않는 2등을 반드시 기억하고 다시 나아가겠다는 김보경의 수상소감처럼 울산 현대는 모든 아픔을 극복하고 우승을 향해 달려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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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행복한 결말로 끝날 거로 생각했지만 반전으로 다가온 울산 현대 이야기 재미있으셨나요? 정말 가까웠던 만큼 아쉬움이 더 클 준우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런 씁쓸한 기억들이 우승의 달콤함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 거겠죠. 다음 글은 NBA의 토론토 랩터스로 찾아뵙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5 14:3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