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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연재]민족혼의 블랙홀 제3화 나 어릴 적 꿈(3절.조기교육4절.제사지내다굶겠다5절청혼)
[소설연재]민족혼의 블랙홀 제3화 나 어릴 적 꿈(3절.조기교육+4절.제사지내다굶겠다+5절청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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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9-07-17 01:17:12 | 글번호 : 20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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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나 어릴 적 꿈


제3절 일대일 조기교육

돌잔치 이후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현부인은 산후조리를 마치고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셨다. 종친 집안이라 사대문 내 운현궁(雲峴宮)에 산다고 들었다.
돌잔치 때 붓을 잡은 여파로, 아버지께서는 젖도 채 떼지 않은 나에게 글을 가르치시려고 들었다. 본디 여아들의 돌잔치 상에는 색지, 자, 실 따위를 놓는 법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드물게 생각이 열린 분이셨다.
“운영전(조선시대 소설)에 보면, 궁의 여인들이 뛰어난 글재주를 겨루지 않느냐. 여아로 태어났다고 하여, 과거시험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학문에 들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부모 된 도리가 아니다. 붓도 함께 놓아, 고를 기회를 주도록 하여라.”
이것이 바로 돌상에서 내가 붓을 잡고 신동이라 칭송받게 된 원인이었다.
처음에는 종이를 아끼기 위하여 아버지가 마련해 주신 장소에 앉아, 바위 위에 먹물 묻힌 붓을 들고 장난삼아 이리저리 휘두르는 수준이었으나, 서너 살이 되자 획에 제법 힘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네 살 때에는 소학(小學)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다섯 살 때에는 천자문(千字文)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평소 아버지가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를 하나하나 귀에 새겼다. 외워서 말할 수도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를 동네방네 자랑하는 대신,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며 함구하시었다. 그러나 소문은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제4절 제사 지내다가 굶는 집안

아버지는 왕비를 두 번이나 배출한 집안의 직계 종손이라는 후광에 힘입어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셨다. 그러나 이미 조정은 벼슬아치들로 인해 포화상태였다. 아버지의 온후한 인품과 관대한 성정으로, 보직 이동을 거듭하여 영주군수 자리에 오르셨지만, 내심 되찾기를 원하던 5대조 민유중(閔維重)의 영의정 자리까지는 도저히 무리였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정승의 좌는 과거 장원급제자도 결코 오를 수 없는 자리였다.
영주군수 자리에서 받는 모든 녹봉은 제사를 지내는데 들어갔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제사를 드리러 오는 다른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의 5대조 민유중은 인현왕후의 아버지로서, 우리 집안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다. 5대조를 비롯한 모든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면, 우리 집 곳간에는 쌀 한 톨 남지 않았다. 심지어 집안 여성들은 딸이건 며느리건 할 것 없이 따로 모여 인현왕후를 추모하는 시간을 별도로 갖기까지 하였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김만중의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와, 어느 궁녀가 썼다는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를 구해다가 읽어주시며, 현숙한 여인이 될 것을 귀가 닳도록 당부하셨다. 이야기 속에서 언제나 인현왕후는 덕이 넘치는 모성의 표상이요, 희빈 장씨는 사악하고 악독한 여우였다.

제5절 폭풍 속에서 스쳐 지나간 한 줄기 낭만

어머니가 몸이 약하시어, 어멈이 행랑채에 살며 일을 도왔다. 반가의 부인은 몸종, 머슴이나 노비를 거느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 집안은 원경왕후와 인현왕후를 배출한 명문가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배를 곯는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가 군민(君民)들을 착취하여 재산을 박박 긁어모으는 탐관오리인 것도 아니었다. 제삿밥을 인근에 나누어 줌으로써 제사상 차리는 날 당일에 들어가는 엄청난 노동력은 어느 정도 해결을 했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는 평일에까지 우리 집을 돌보아 줄 일꾼에게 줄 삯은 없었다. 다행히 어멈은 이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음에도, 끝까지 떠나지 않고 행랑채에 남아 있었다. 어멈은 우리 어머니에게 젖을 먹였던 유모의 딸이었다. 젊은 시절, 당시 왕실의 외척이라 일컬으며 한창 기세가 등등하던 홍씨 집안의 자손 한 명이, 어여쁜 처녀였던 어멈을 첩으로 삼겠노라고 약조하여 아들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잘 나가던 홍씨 집안은 최고점에 있던 1인이 세도를 잃자 급격히 몰락하였고, 어멈은 어린 아들과 함께 남겨졌다.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아기를 낳은 어멈에 대해 그 어떤 타박도 하지 않고, 아이와 더불어 몸을 보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었다. 덕분에 나는 또래 친구가 생겼고, 성남(聖南)이와 더불어 놀 수 있었다. 뒤에 드러나는 이유에서, 나는 성남이 말고는 친구가 없었다. 어릴 때만 해도, 비록 말투에서는 상하관계가 있을지언정, 아이들 마음속에는 위아래, 반상의 구별, 지위고하가 없었다.
여섯 살 때의 시간이 눈앞에 흘러간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 앞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 낭독을 마치고는, 소꿉놀이를 하고 싶어서 성남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 때, 어디선가 성남이가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온몸이 맞은 자국, 할퀸 자국, 꼬집힌 자국으로 가득해 성한 곳이 없었으나, 표정만은 득의양양하였다.
오뚝한 코가 깨져 속이 상했다.
“성남아, 왜 이렇게 다쳤어?”
내가 물었다.
“마을 아이들이 아씨를 욕했어요! 아씨가 말도 빨리 하고, 남자도 못 읽는 글을 읽는 게 귀신이 씌어서 그런 거래요! 인현왕후 귀신이 씌였다면서, 굿을 해야 풀 수 있다는 거예요. ‘너희 아씨는 귀~신이야!’라면서 아이들이 저를 놀렸어요. 화가 나서 아이들 모두를 때려주었죠.”
어린 마음에도 기가 막혔다.
“마을 아이들이 몇 명인데, 그 많은 아이들이 너 혼자를 에워싸고 때리더냐? 너는 또 그 많은 아이들을 혼자 상대했고?”
내가 다그쳤다.
“아씨더러 귀신이라는데, 그럼 제가 가만있겠습니까? 아씨에게 나쁘게 대하는 자는, 제가 지옥 끝까지 달려가서 물고를 내 버릴 거예요.”
성남이가 말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돌잔치 당시 아버지와 현부인이 나누었던 대화가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 소문이 와전된 듯 하다. 다행인 것은, 아버지께서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오지에 부임했던 덕에, 인현왕후의 현신이니 귀신이니 하는 소문이 한양까지는 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왜놈의 칼에 유명을 다 하기 훨씬 이전에, 역적으로 몰려 3대가 능지처참을 당하거나, 만의 하나 그런 꼴을 모면하였더라도, 이전 주상전하의 후궁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각설하고, 내가 말했다.
“마을 아이들이 나를 경원(敬遠)시 하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필경 군수의 자제라고, 질시하는 것일게다.”
성남이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니오. 경원이나 질시 같은 어려운 단어는 잘 모르겠지만, 제 눈에도 아씨처럼 곱고 영민한 분은 다시 없어요.”
그러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옥으로 만든 가락지였다.
“아씨, 이걸 받으시고, 장성하여서는 저와 혼인해주세요!”
성남이는 무릎을 꿇고 내게 옥가락지를 내밀었다.
온몸이 다쳐 피투성이가 된 채 가락지를 내미는 태도가 자못 비장하였다.
어린 내 눈에도, 가락지는 몹시 귀해 보였다.
“성남아, 이건 대체 어디서 났어?”
가락지를 덥석 받지 못했다.
일단 물어보았다.
“마을 아이들을 때려주고, 화가 덜 풀려서 마을에서 가장 잘 사는 배 좌수네 집을 찾아갔어요. 당신 자식이 아씨에게 귀신 씌었다고 말한 걸 알고 있냐고 물어보았죠. 군수께서 이를 아시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한 마디만 했는데, 좌수가 지레 겁먹어서, 이걸 주더군요. 쪽빛이 너무 고와서, 아씨 주려고 가져왔습니다.”
요컨대 내가 욕 먹는게 싫어서, 욕하는 애 부모에게 가서 따졌더니 입막음용으로 뇌물을 상납했다는 것이다. 내가 옥가락지를 보면서 망설이고 있자, 성남이가 다시 말했다.
“아씨, 아씨는 참으로 고우세요. 저는 평생 아씨 곁에 있고 싶습니다. 그러니 커서 제게 시집 와 주세요.”
나를 위해 싸우고 온 성남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성남이가 옥가락지를 끼워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노호성이 울려 퍼졌다.
“지금 뭐 하는 짓들이냐!”

-제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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